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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9. 29. 01:29

치우천황(chiwoo) Damul Korea2016. 9. 29. 01:29

 

중화민족은 허구이다.

옛날,타민족의 지배를 받고 이를 방어하기 위해 쌓은 국경인 만리장성 너머 이민족의 땅인 곳에서 요하문명이 1984년 이후로 발견이 되자, 황하문명이 아시아 최초라고 주장하던 중국이 요하공정을 시작으로 중국의 시조인 황제가 요하문명이 자기역사의 발원지라고 주장하고 현재의 영토에 남겨진 모든 유적,유물과 역사가 피지배였음에도 불고하고 역으로 자기들의 역사라고 주장하고 나서는것이 현재 중국 공산당의 중화사상의 핵심으로 급부상하고 있다.

중국공산당이 존재하지 않는 민족인 중화민족(?=미국인은 있지만 미국민족이란것이 말이 안되듯)의 굴기를 위해 치우천황을 중국의 역사에 편입하다.

현재의 냄비근성및 소극적인 역사관은 일제의 식민사관과 중국의 만주 철도부설권및 조선의 영토를 불법적으로 거래함으로 시작된 것이다.

근시안적인 자세로 결코 우리의 상고사를 잊지말자.

요하문명은, 우리의 발원지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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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3LegsCrow::하늘날다 두루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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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공정 고구려 역사 편입은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중국에서 고구려 역사서 및 논문을 앞에 중국 고구려 연구... 등등으로 붙여서 나오는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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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6. 8. 00:14

中, 역사 침탈 중대위기 Damul Korea2012. 6. 8. 00:14

만리장성은 중국의 국경,만리장성의 영역을 허위로 늘려 안시성,평양까지 넘보다 

The Great Wall of China is their border.





평양까지 침범한 중국의 동북공정



NGC 한국판의 만리장성


“中, 역사 침탈로 영토 확장 노림수… 한반도에 중대 위협”


[세계일보]중국의 ‘만리장성공정’에 국내 역사학계가 발칵 뒤집히고 있다.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를 중국의 것으로 만들려는 중국의 의도가 담긴 까닭이다. ‘만리장성이 고구려 영역에까지 이어졌다’는 발표가 동북공정을 추진했던 사회과학원이 아닌 중국 정부기관인 국가문물국이라는 점에서 특히 그렇다. 역사학계에서는 “한국 고대사를 중국 역사로 만들려는 동북공정이 다시 시작됐다”는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중국의 성이 돼버린 고구려 성

중국이 만리장성 영역을 확대함으로써 고구려와 발해의 성은 ‘중국의 것’으로 변할 위기에 처했다. 고구려와 발해가 고대 ‘중국의 지방정권’이었다는 동북공정에 담긴 논리의 연장이다.

이번에 중국이 만리장성에 포함한 지린성에는 많은 옛 고구려 산성 유적지가 남아 있다. 중국이 2009년 만리장성의 동단으로 못박은 랴오닝성 단둥의 박작성(泊灼城·중국명 후산성)도 고구려 성이다. 중국 국가문물국이 연장된 만리장성에 어떤 고구려성을 포함했는지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지만, 고구려의 핵심지역을 이룬 환도산성·오녀산성·국내성도 만리장성의 영역에 포함된 것으로 보인다.

환도산성은 지린성 즙안현에 있는 고구려 성으로, 2대 유리왕이 기원후 3년 졸본에서 국내성으로 천도하면서 국내성에서 가까운 산에 축조한 산성이다. 원래 위나암성(尉那巖城)으로 불렸으며, 외침에 대적한 한민족의 기개가 살아있는 곳이기도 하다. 지린성 연변조선족자치주에 있는 발해의 유적지 성산자산성(城山子山城)도 예외는 아니다. 이 산성은 발해를 세운 대조영이 건국의 근거지로 삼은 동모산(東牟山)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중국은 이미 이 산성을 2006년 6월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해 표석까지 세워 놓았다.

전문가들은 이미 중국이 고구려·발해사에 대한 야심을 표명한 이상 명백한 의도를 파악해 대응할 것을 주문했다.

중국 지린성 지안현에 방치된 국내성터. 고구려의 수도였던 국내성은 지금은 성곽 흔적만 남아 있을 뿐으로, 현대식 건물들이 속속 들어서면서 사라질 운명에 놓여 있다.
◆“동북공정 다시 시작됐다”

국내 역사학계는 “중국이 역사왜곡을 재개했다”고 분석한다. 우석대 역사교육과 조법종 교수는 7일 “중국 발표 내용의 핵심은 만리장성의 개념을 역사적으로는 전(全)시대로, 지리적으로는 중국 영토 전역으로 확대하려는 것”이라며 “중국 역사 속의 성벽이나 거점을 무조건 ‘만리장성’이라고 부르는 것은 중국의 역사공간을 최대한 확대하는 과정”이라고 말했다. 또 “이 같은 개념 재정립이 우리나라에 중대한 위협이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강원대 역사학과 남의현 교수는 “중국이 티베트 문제와 신장위구르·네이멍구·만주 등 변경 문제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고구려와 발해도 중국의 지방정권으로 만들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동북아역사재단은 이날 “지린·헤이룽장성 지역은 고구려와 발해의 영역이었던 곳으로, 이들이 남긴 성곽 유적이 산재한다”며 “이들 유적이 장성의 범주 안에 들어가 있다면 사실관계를 왜곡하는 것”이라는 검토 의견을 냈다.

동북아역사재단은 또 “현재까지 고구려·발해 유적이 역대 장성의 조사내용 안에 포함되어 있는지 판단할 수 없다”면서도 “중국의 ‘장성자원조사’ 사업은 중국의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을 뒷받침하기 위한 사업이라는 점에서 일견 동북공정의 사업으로 보이지만 현재로서는 단정할 수 없다”는 신중한 입장을 보였다.

동북아역사재단은 현재 국가문물국의 발표와 관련된 자료를 갖고 있지 않은 상태다.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이란 동북공정 등 중국의 역사왜곡 프로젝트의 기본 논리로, 현재 중국 땅에 있거나 과거 또는 현재 중국 영토에 존재했던 모든 민족은 중국인에 속하며, 그들의 역사 또한 중국의 역사라는 주장이다. 이 경우 한민족의 역사는 중국사로 뒤바뀐다.

◆남북통일시대를 겨냥한 ‘만리장성 공정’ 

이번 발표가 한반도 통일 이후를 고려한 포석이라는 지적도 나왔다.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정치학과 임형진 교수는 “중국은 모든 역사를 정치적으로 해석한다”면서 “이번 만리장성 영역의 확장 이면에 있는 정치적 의도를 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임 교수는 “북한이 경제적으로 점점 중국에 예속되고 있고, 이런 경향이 심화할 경우 고구려·발해가 실재했던 만주 땅 이야기를 거론하기도 어렵다”면서 “중국은 이번 발표를 계기로 북한에 대한 권리 주장과 옛 만주 지역의 한민족 역사마저 중국사로 편입하려는 분명한 의도를 드러냈다”고 지적했다.

남북한 통일 문제와 관련해 그는 “중국이 동북공정을 통해 한국 고대사에 존재했던 나라나 역사·문화를 자국의 일부로 만들려는 의도는 결국 북한에 대한 집착을 역사적 근거를 통해 보여준 것”이라며 “이 경우 통일은 더욱 어려운 문제가 될 수 있는 만큼 북한 경제가 중국이 아니라 한국에 의존할 수 있도록 남북한 교류면에서 문제를 풀어가야 한다”고도 했다.

동북아역사재단은 12일 중국 장성 관련 국내 전문가 긴급 간담회를 개최해 중국 발표에 대한 대응책을 논의하기로 했다. 

신동주·박영준 기자 ranger@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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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게서 간도 되찾는 다섯가지 방법은
<특별기고 일본-중국 흥망 키, 류큐⑮ 제4세대, 동북공정으로 드러나다> 
국제법에도 없는 ´100년 시효설´ 유포자는 중국인 아닌 한국인들…
강효백 경희대 교수 (2011.08.27 04:4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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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중국은 과거 30년 전의 중국이 아니다. 마치 300년 전의 천상천하 유아독존 시절의 대청제국 같다. 점(點)을 돌려달라는 게 아니라 선(線)과 면(面)을 통째로 삼키고 싶다고 공공연히 부르짖고 있기 때문이다. 흔히 알려진 대로 중국은 지금 중일 분쟁의 초점이 되고 있는 센카쿠(첨각(尖閣),중국명 댜오위다오·釣魚島)만 원하고 있는 게 아니다. 

최근 중국 일각에서는 센카쿠 뿐만 아니라 오키나와(沖繩, Okinawa)를 포함한 140여개 류큐(瑠球, Ryukyu) 전체가 중국 영토라는 목소리가 갈수록 높아 가고 있다. 2009년 12월 베이징에서 열린 한 국제심포지엄에서는 쉬융(徐勇) 베이징대 교수를 비롯한 중국 역사학자들이 이구동성으로 목청을 돋웠다. 일본 메이지(明治) 정부의 강압에 의한 1879년의 류큐 병탄, 2차 세계대전 후인 1972년 미국의 오키나와 반환 등은 국제법상 근거가 없으니 센카쿠는 물론, 류큐 군도내 140여개 섬과 해역 전체를 송두리째 중국에 반환해달라는 것이었다. 

중국에서는 2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류큐를 중국 영토라는 주장이 간헐적으로 있었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거의 사라졌다가 2006년 이후 다시 수십 편의 논문을 비롯한, 언론 학계의 주장들이 우후죽순처럼 늘어나고 있다. 이에 대해 현재 중국당국은 묵인을 넘어 조장 내지 권장하고까지 있다는 동향마저 감촉되고 있다. 도대체 중국의 이런 움직임은 무엇을 의미하는 건가?<필자 주>


목차 

1. 넓은 일본의 키, 류큐 
2. 제1차 일본제국주의의 은신처, 류큐 
3. 제2차 일본제국주의의 출항지, 류큐 
4. 제3차 불침 항공모함의 출항지, 류큐 
5. 이중 종속 왕국, 류큐의 흥망사 
6. 30년 터울, 일제의 류큐와 조선의 병탄사 
7. 좁은 중국의 족쇄, 류큐 
8. 그랜트 전 미국대통령의 류큐 3분안 
9. 루즈벨트와 장제스 
10. 실크로 포장한 중화제국 
11. 순망치한의 입술은 북한이 아니라 만주였다 
12. 제1세대, 서남방 티베트와 인도를 침공하다 
13. 제2세대, 동남방의 여의주를 입에 물다 
14. 남서군도, 이어도와 영서초, 오키노도리 
15. 제3세대, 서북방에서 달콤한 과실을 따먹다 
16. 제4세대, 실키 중화제국, 동북공정으로 드러나다 
17. 독도와 센카쿠 
18. 제5세대, 북한과 류큐로 나아갈 것이다
간도를 잃지 않으려면 잊지 않아야 한다 
한국과 중국 사이(間)에는 섬(島)이 있다. 그 섬은 바로 간도(間島)이다. 간도는 주위가 물로 둘러싸인 예사 섬은 아니다. 간도는 사방이 동북아 민족의 혈사(血史)로 에워싸인 ‘역사적 섬(Historic Island)’이다. 

바다의 섬들이 21세기 세계 각국에게 그 중요성이 갈수록 도드라지는 땅이라면 대륙의 섬 간도는 대한민국에게 체념과 망각의 피안너머로 사라지게끔 해서는 안 될 우리의 소중한 옛 영토이다. 잃지 않으려면 잊지 않아야 한다. 

간도라는 지명의 유래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조선과 청나라의 사료를 검토해보면 만주족의 청나라가 중원을 석권한 뒤 만주 중북부지역을 약 200년간 사람의 주거와 수렵활동이 금지된 중간지대인 봉금지역으로 정한 것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아래 지도들에서 알 수 있듯이 조선과 청나라 양국간의 국경선은 압록강과 두만강이 아니었다. 압록강과 두만강보다 훨씬 북쪽으로 들어간 지역에서 양국간의 경계가 획정되었다. 지금의 랴오닝, 지린 성의 남부지역은 조선땅이었다. 랴오닝과 지린 성의 중북부와 헤이롱장성은 중간지대 즉 간도였다. 간도는 세계역사상 최장 최대의 비무장지대(DMZ)였던 셈이다. 

따라서 이제껏 간도로 알고 있었던 현재의 중국 ‘연변조선족자치주’는 19세기 중반까지는 중간지대, 간도가 아니라 완전한 조선영토에 속하였다. 원래 연변조선족 자치주의 이북지역에 위치해 있었던 간도가 19세기 후반에 이르자 남만주 지역으로 축소 후퇴하여 원래의 간도지역은 북간도로, 조선영토였던 지역은 두만강 이북의 동간도와 압록강 이북의 서간도로 불리기 시작한 것으로 생각된다. 

◇ 1745년 키친(T. Kitchin)이 제작한 ‘A Map of QUAN-TONG or LEA-TONGE PROVINCE ; and the KINGDOM of KAU-LI or COREA’ 지도. 동해를‘SEA OF KOREA’라고 표기했다. 중국과 한국의 국경선이 압록강, 두만강 이북에 형성 된 것으로 나온다. 경희대 부설 혜정박물관 소장, 신동아 2005년 3월호 참조 출처: http://blog.naver.com/solhanna?Redirect=Log&logNo=80010346647

◇ 1749년 프랑스 지리학자 당빌리에(D’Anville)가 제작한‘et des Rojaumes de COREE ET DE IAPAN’ 지도. 한국 평안도(PINGAN·왼쪽 밑줄)가 압록강 이북의 현 중국 집안지역까지로 돼 있고, 함경도(HIENKING·오른쪽 밑줄)도 두만강 이북 간도지역을 포함하고 있다. 18세기 제작된 서양의 여타 지도에도 양국간의 국경선은 이와 흡사하게 표시되어 있다. 경희대 부설 혜정박물관 소장, 신동아 2005년 3월호 참조, 출처: http://blog.naver.com/solhanna?Redirect=

동북공정, 암탉(중국)이 병아리(북한)를 데리고 가듯 

장쩌민시대의 서부대개발이 경제적 접근논리에 중점을 두었다면, 후진타오시대의 동북공정은 역사적 문화적 지정학적 접근논리에 중점을 두고 있다. 동북공정은 중국의 동북지역(만주)과 한반도의 역사적 문화적 지정학적 상관성을 부정한다. 

동북공정에서의 ‘동북’이라는 범위는 동북 3성에 국한하지 않는다. 간도(남만주)는 물론 북한지역(특히 대동강과 원산만 이북 지역)과 그 해역, 나아가 제주도와 이어도 해역 등 한반도를 모두 포괄한다는데 문제의 엄중성을 인식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동북공정은 초기 고구려 역사를 중국사로 편입시키는 논리개발에서 진화를 거듭하여 이제는 한반도와 주변 해역까지 넘보는 전 방위 공세로 치닫고 있는 것이다. 

북한지역의 동해 어업권을 획득하고 나진항을 50년조차(기한자동연장계약식 조약체결로서 사실상 영구조차)한 후진타오 정권은 자국의 내해를 북한의 동해 해역으로까지 확장하려는, 즉 중국의 군함이 동해에까지 진출하는 중장기플랜을 수행하려는 동선(動線)을 예고하고 있다. 

중국은 근래 <환구시보(環球時報)>를 비롯한 각종언론매체를 통해 북한급변사태 발생시 중국군의 북한지역내 주둔 계획을 공공연히 밝히고 있다. 최근에는 우리나라 일부언론에도 공개된 바 있는 ‘암탉이 병아리를 데리고 가는’, 이른바‘모계대소계(母鷄帶小鷄)계획’을 중국의 북한전문 인터넷 사이트 <朝鮮中國>에 네티즌 논객 논단 형식으로 슬금슬금 흘리고 있다. 암탉은 중국을, 북한은 병아리를 의미하는 이 계획의 골자는 중국 인민해방군이 북한 급변 사태 때 남포와 원산을 잇는 대동강 이북지역을 점령하여 북한전역의 치안을 유지해 북한 주민들의 동북3성 유입을 막는다는 것이다. 

동북공정의 궁극적 목표가 북한지역 점령과 한반도 주변해역 침탈이라는 마각을 대놓고 드러내고 있는 주변상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도를 비롯한 북방영토에 대한 우리의 인식과 대응을 살펴보았더니, 피해의식과 무사안일을 넘어 자책골이 연상될 만큼 심각한 문제점들이 한 둘이 아니었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 다섯 가지만 들자면 

1. 간도 100년 시효설 
2. 헌법 제3조 
3. 통일신라 시대명칭 
4. 북한의 반민족적 저자세 
5. 총체적인 대응전략 미흡 등이다. 

이들 5개 문제점과 관련한 심층 분석과 함께 대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자책골 1호, 간도 100년 시효설 

무엇보다 우선 척결해야 할 것은 ‘간도 100년 시효설’이다. 영토를 점유한지 100년이 지나면 나중에 무효로 할 수 없다는 고약한 괴담이 우리나라 온오프라인에 정설로 둔갑해 창궐하고 있다. 내로라할만한 한국의 오피니언 리더들조차도 각종 시론과 칼럼에 100년 시효설을 근거로 하여 “이제 간도는 영영 중국 땅”식으로 적고 있다. 때문에 일반 국민들 다수는 간도가 중국으로 넘어간 지 100년이 지났으니 간도는 영원히 중국 땅으로 굳어져버렸다고 탄식하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국제법상 영토문제는 시효가 없다는 것. 필자가 16세기부터 2011년 현재까지 동서고금의 모든 영토관련 국제규범과 다자조약, 양자조약, 국제판례를 전수분석한 결과 남의 나라 영토를 ‘100년간 점유’하면 자기 나라 땅이 된다는 조항이나 판례는 단 한 구절도 발견할 수 없었다. 

다만 4세기 전의 단 한 사람만의 주장을 접할 수 있었다. 그는 바로 ´국제법의 아버지(필자 의견: 서세동점의 제국주의시대 유럽우월사관에 근거한 과잉칭호) ´로 불리는 네덜란드의 휴고 그로티우스(Hugo Grotius 1583~1645). 그는 저서 <전쟁과 평화의 법>에서 “실효적으로 점유한 영토가 100년이 지나면 해당국의 영토로 간주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로티우스가 이런 주장을 한 시대적 배경은 무엇일까. 그가 활약하던 17세기초 네덜란드가 자바에서 영국세력을 몰아내고 인도네시아에 식민지를 건설하기 시작한 것에 부응하기 위한 일종의 ‘주문자생산방식의 맞춤학설’내지 ‘어용학설’이었다. 만일 100년 시효설이 영원불변의 진리라면 그로티우스의 모국인 네덜란드가 350년간 통치한 인도네시아는 여전히 네덜란드 땅이 되어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간도 100년 시효설 유포자는 중국인이 아니라 한국인 

간도 100년 시효설을 최초로 유포자는 누구일까? 필자는 먼저 중국측을 의심하고 샅샅이 뒤져보았다. 그러나 중국의 논문과 언론매체에서는 한국이 간도 100년 시효설을 주장하고 있다는 내용 외에는 중국측이 조작 유포한 혐의는 찾을 수 없었다. 다만 간도 관련기사 말미에 “한국 너희들 말처럼 이제 100년 지났으니 간도는 영원히 우리 중국땅이다. 으흐흐흐”식으로 비웃거나 표정관리하는 중국 네티즌들의 댓글은 다수 발견할 수 있었다. 

간도 100년 시효설의 최초 유포자는 중국인이 아니었다. 놀랍게도 한국인 김 모 교수였다. 김 교수는 2009년 11월 9일 한 인터넷 매체에다‘간도영유권 100년 시효설의 긍정적 수용 제의’라는 납득하기 어려운 제목으로 기고한 글에서이다. 이는 필자가 언론매체 칼럼으로는 한국 최초로 (국민일보 2009. 5.20) 간도 100년 시효설이 허구라는 견해를 밝힌 것을 계기로 하여 우리학계 일각에서 일기 시작한 의문에 대한 해명성 글로 여겨진다. 

김 교수는 그 기고문에서 100년 시효설은 1977년 백산학회 창립 제31주년 기념 학술회의에서 자신의 주장에 기원한 것이라고 자랑스럽게(?) 밝혔다. 김 교수 글의 요지를 그대로 인용해본다. 

당시 필자는 그로티우스의 100년 시효기간을 원용하여 “1909년 이래 간도를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중국은 한국의 항의가 없는 경우 적어도 2009년에는 국제법상 간도의 영유권을 취득하게 된다”고 주장하여 상기 ‘시효취득 100년 시효설’을 주장한 바 있다. 

상기 김교수 이외에도 또 다른 김 모 재미학자는 실효지배 100년을 넘기면 국제소송조차 제기할 수 없다고 하며 그로티우스의 100년 시효설을 가장 먼저 제기한 주인공이라고 바로 자신이라고 주장하였다. 
두 김 교수들은 서로 그로티우스 100년 시효설을 먼저 말했다며 이른바 ‘원조경쟁’을 벌이고 있는데, 이는 마치 축구경기에서 자책골을 자기가 넣었다고 우기는 격이다. 

먼저 후자의 김 교수에게 묻겠다. 100년을 넘기면 국제소송조차 할 수 없다고 그로티우스가 언급한 적이 있던가? 두 김 교수에게 묻겠다. 설령 그로티우스가 국제법의 아버지, 아니 국제법의 할아버지라고 치자, 그렇지만 그로티우스의 주장이 국제법세계에서 영원히 따라야 할 전지전능한 신의 말씀이라도 된다는 말인가? 17세기 일개 학자의 주장의 효력이 현대에 통용되고 있는 국제협약, 다자조약, 양자조약, 국제판례, 국제관습법, 보편적인 국제법원칙보다 우선하는가? 이것과 17세기 조선시대 일개 학자의 주장이 21세기 대한민국 헌법과 법률보다 우선 적용해야 한다는 얼토당토 않는 주장과 그 무엇이 다른가? 

◇ 1700년대 중반 중반 정상기(鄭尙驥)가 만든 한국 최초의 근대적인 한국지도인 동국대전도(보물 제1538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세로가 2m72cm에 달하는 대형 조선전도로 표현된 범위는 남만주와 한반도를 아우르고 있다. 특히 18세기 무렵 청나라가 봉금조치를 내린 북만주의 간도지역과 조선영토의 경계를 명확하게 표시해주고 있다. 출처: http://cafe.naver.com/secretofisland/25
99년 만에 중국이 홍콩을 반환받았다고?

물론 그로티우스의 100년 시효설을 원용하고, 민간단체들이 이 설을 유포한 동기를 최대한 좋게 해석한다면, 간도에 대한 국민적 관심을 높이고 정부에 간도문제의 해결을 촉구하기 위한 의도였다고 이해할 수는 있다. 

그러나 100년 시효설은 결과적으로(단, 누구라도 충분히 예견할 수 있었던 결과), 중국에게 간도를 내주는 가장 완벽한 논리를 제공한 셈이다. 두 김 교수가 그로티우스의 주장을 간도 100년 시효설의 근거로 원용한 것은 참으로 근시안적이고 자가당착적인 국토 참절적 언행이 아니라고 아니 할 수 없다. 

이러한 치명적 자책골로 연결되는 백패스‘100년 시효설’이 우리 수비수의 몸에 맞아 골문 가까이 진입한 시점은 1997년 홍콩반환 무렵이었다. 당시 한국의 정 언 학 일각에서는 중국이 홍콩을 99년 만에 반환받았으니 우리도 2009년이 되기 전에 일본이 중국에 불법으로 넘겨준 간도를 되찾아보자고 목청을 돋우었다. 100년 시효설이 국제사회의 보편적인 원칙인양 더욱 그럴싸한 철칙처럼 굳어졌다. 

흔히들 조차조약 기간은 대부분 99년간으로 알고 있는데 이는 명백한 오류이다. 조차조약의 조차기간은 조약 당사국이 정하기 나름이다. 99년만에 중국이 홍콩(홍콩섬+구룡반도+신계)을 반환받은 것이 아니다. 중국은 영국에 1842년 영구조차당하였던 홍콩섬을 155년 만에, 1860년 영구조차당하였던 구룡반도를 137년만에 되찾은 것이다. 중국이 99년 만에 되찾은 지역은 1898년 제2차 북경조약으로 99년간 조차당하였던 홍콩변두리지역인 신계지역 뿐이다. 

그리고 100년 시효설이 맞는 것이라면 신계를 제외한 홍콩의 핵심부분인 홍콩섬과 구룡반도는 여전히 영국 땅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 100년 시효설이 정설이라면 포르투칼이 450여년간 점령한 마카오도 여전히 포르투칼 땅이어야 한다. 

대못을 뽑아내듯 간도 100년 시효설을 척결해야 

간도협약은 법적 권원이 없는 제 3국에 의한 영토 처리이므로 국제법상 무효이다. 일제가 1909년 간도협약을 체결한 바탕이 된 1905년 을사늑약(을사보호조약), 역시 강압에 의한 것으로 원천 무효이다. 국제법상 보호조약이란 보호국이 외교권을 장악할 뿐, 피보호국의 영토처분권까지 갖게 하는 것은 아니므로 동 조약이 법적근거가 될 수 없다. 

거듭 강조하건데 국제법상 시효기간이 없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하지만 팔마스섬사건과 베네수엘라와 가이아나국경분쟁사건 등 소수의 국제 판례에서는 어떤 국가가 다른 국가의 영토를 통치권을 행사해왔는데, 당해 영토의 국가가 ‘오랫동안’ 항의하지 않은 경우, 그 영유권을 포기한 것으로 간주된다고 판시하고 있다. 

이처럼 국제 판례는 구체적 시효기간은 명시하지 않고 있지만 100년이라면 ‘오랫동안’으로 유추 해석될 위험성이 전혀 없다고 볼 수 없다. 따라서 우리 정부는 하루빨리 간도협약이 무효임을 공식 선언하여야 한다. 아울러 우리 정부는 대못을 뽑아내듯 다수 국민들을 체념하게 만든 원흉, 간도 100년 시효설이 터무니없는 허구라는 실상을 공포하고 이를 널리 홍보하여야 할 것이다. 

100년 시효설을 주장하거나 그것의 유포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인사들은 지금이라도 100년 시효설이 오류였다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인정하고 사과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2009년 백산학회와 간도되찾기 운동본부는 100년 시효설은 오류였다고 솔직히 고백한 바 있다. 지식인일수록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고 시정할 수 있는 용기는 목숨을 바치는 용기보다 더욱 어렵다고 한다. 필자는 이러한 진솔한 용기를 실행한 두 민간단체를 높이 평가하며 필생의 연구태세의 거울로 삼고자 한다. -계속- 

글/강효백 경희대 국제법무대학원 중국법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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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 경희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대만 국립사범대학에서 수학한 후 대만 국립정치대학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베이징대학과 중국인민대학, 중국화동정법대 등에서 강의를 하기도 했으며 주 대만 대표부와 주 상하이 총영사관을 거쳐 주 중국 대사관 외교관을 12년간 역임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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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OREAN NORTHERN TERRITORY WITH MT.BAEKDU
간도 is Korean Territory

 


 

 

 

 

간도임시정부, '간도 땅 되찾기' 헌법소원 내기로
'동북공정 진행하는 중국, 한국은 뒷짐만'

재미 교포 기업인, 간도 되찾기 운동 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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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6. 15. 00:18

동북아를 주름잡던 찬란한 홍산문명 Damul Korea2011. 6. 15. 00:18


실제로 부여와 고구려의 건국 신화는 거의 같다. 부여의 시조東明(동명)인 것처럼 고구려도 동명을 시조로 모셨다. 흥미로운 사실은 백제도 동명이 시조이며, 백제 왕의 성이 부여 씨라는 것이다. '백제는 부여의 별종'이라는 기록도 여러 사서에 등장한다. 결론적으로 부여와 고구려, 백제는 같은 뿌리에서 나온 나라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 고구려조에서는 고구려가 부여의 별종(別種 - 한민족에서 갈라져 나와 나라를 세워 뿌리가 같음을 의미)이라고 나옵니다.
5세기 후반 백제가 북위에 보낸 국서에서는 백제와 고구려가 모두 부여에서 기원했다고 하였습니다.
졸본부여에서 고구려로 개명하고 다시 장수태왕 때 고려로 개명한 것으로 압니다.



부여에서 갈라져 나온 고구려, 백제, 발해


≪삼국유사≫에 의하면 “부여군은 옛 백제의 왕도이니 혹은 소부리군(所夫里郡)이라고도 한다.”고 하였습니다. ≪삼국사기≫에도 “백제 성왕 16년 무오(戊午) 봄에 수도를 사비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라 한다.”라고 하였고, 주(注)에 그 지명은 ‘소부리’라고 하였습니다. 사비는 지금의 고성진(古省津)이며 소부리라는 것은 부여의 별칭이라고 하였습니다.


또 양전장적(量田帳籍)에 의하면 소부리군은 농부의 주첩(柱貼)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말하는 부여군이란 상고(上古)의 이름을 되찾은 것이죠. 그리고 ≪삼국사 三國史≫에서는 백제왕의 성이 부씨(扶氏)이므로 그렇게 일컬었습니다.


또, ≪고전기 古典記≫를 인용하여 제26대 성왕에 이르러 도읍을 소부리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라 하여 제31대 의자왕에 이르기까지 120년을 지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남부여라는 국호는 백제가 성왕 때 중흥을 꾀하면서 사용하기 시작하여 멸망할 때까지 불린 것입니다.

발해를 건국한 대조영과 절대다수의 발해 주민들이 고구려와 같은 부여예맥 종족이라는 근거
 


<구당서 발해말갈전>
발해말갈의 대조영이란 자는 본래 고려별종이다.
渤海靺鞨大祚榮者 本高麗別種也

고려별종이라고 언급한 사서들-당회요, 오대회요, 구오대사, 태평환우기, 책부원구, 신오대사, 무경총요, 자치통감, 고려도경, 송사, 요사, 송회요

<신당서 발해전>
발해는 본래 속말말갈이 고구려에 귀부했던 이들로 성이 대씨이다.
渤海 本粟末靺鞨附高麗者 姓大氏

<속일본기>권22
발해의 문왕 대흠무가 스스로 고려국왕대흠무언高麗國王大欽茂言라 하렸고 일본의 회답서에도 발해를 고려국이라 칭했다.

같은 책 권10에
대무예의 계에....고려의 옛땅을 회복하고 부여의 유속을 가지고 있다.
大武藝啓...復高麗之舊居 有夫餘之遺俗

,책부원구>에서는 속말말갈이 수나라에 투항하자 수나라는 이를 위해 부여후라는 직함을 내렸다.

이는 모두 명확히 속말말갈은 고구려 부여와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밝히는 것이죠. 말갈의 7부 중에 <수서 말갈전>에는 불열이동은 모두 돌화살을 사용하며 옛 숙신사람이다.自拂涅印 矢皆石鏃 卽古肅愼氏也라고만 하고 불열 이서지역의 속말말갈 등의 부에 대해서는 옛 숙신인들이라고 여기지 않고 있죠.

속말말갈이 거주하던 송화강 상류는 자고이래로 계속해서 예맥족이 살던 지역입니다.

북위때에 동쪽에 있던 물길이 서쪽으로 옮겨갔지만 고고자료나 문헌자료를 통해 볼 때 그들이 송화강을 건너 그 서쪽까지 넘어오지 않았음이 증명됩니다. 그러므로 속말말갈 중에도 틀림없이 숙신종족이 성분이 융입되기는 했으나 역시 주체민족은 예맥종족이었죠.

문헌의 기록을 통해 보면 예맥족의 한 지파는 장기간에 걸쳐 지금의 송화강 상류에 살았고 경제 문화가 비교적 발달해 있었습니다.

부여는 네차례의 과정을 거치면서 고구려에 병합되어지게 됩니다.


첫째는 고주몽이 부여로부터 도망쳐 고구려(즉 계루부)를 건국할 때 따라나온 무리들이 있었죠.

두번째는 A.D22년 고구려 대무신왕이 동부여를 쳐서 그 왕 대소를 죽이자 대소의 종제(從弟)가 1만여 명을 이끌고 고구려에 투항하여 고구려가 이들을 중심으로 연나부를 설치할 때의 사람들이 있었고 세번째로는 대소의 또 다른 동생이 자립하여 왕이 되어 갈사수 가에 도읍을 정했다가 A.D68년 고구려에 투항할 때 휩쓸려온 이들이 있었죠.

마지막 무리로는 A.D477년 부여왕이 처자와 노비를 이끌고 고구려에 투항할 때 편입된 부여인들입니다. 이들 외에 개별적으로 고구려에 투항한 이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5세기경에 부여왕이 고구려에 투항한 이후 부여는 모두 고구려에 예속되었죠. <위서 고구려전>에 '(고구려의 강역)은 북으로 옛 부여 지역에 이릅니다. (高句麗疆界) 北至舊夫餘고 하였고 <구당서>와 <신당서>의 <고려전>에도 모두 고구려에 <부여성>이 있다고 했으며 곧이어 당이 고구려를 정복하여 부여성을 무너뜨렸다고 했죠. 부여인으로 고구려에 들어간 무리들의 사정은 서로 다릅니다. 초기에 고구려에 귀화한 부여인은 모두 고구려에 융합되었으나 맨 나중에 편입된 자들은 그때까지 고구려백성으로 다 동화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물론 같은 예맥족이긴 하지만 지역특성이 있고 부여인이라는 정체성도 나름대로 견지하고 있었을 터이죠.


부여가 망한 후 지금의 길림시 일대는 고구려의 영역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곳의 부여 유민은 고구려에 불복 여러차례 고구려의 정복전쟁의 대상이 되었죠. 그들이 사는 곳이 속말수(지금의 송화강 북류 끝)이었기 때문에 역사에서는 이를 속말말갈이라 불렀던 것입니다.
 


과거의 일반인은 모두가 속말말갈을 숙신계로 여겼죠. 즉 물길인이 서쪽으로 이동하여 이곳에 왔다는 것이죠.

그러나 <수서 말갈전>에 불열이동은 화살을 모두가 석촉을 사용하고 있죠. 즉 고대 숙신씨들이다.라 하여 불열 이서지역의 속말말갈은 숙신계가 아님을 밝히고 있습니다. 또 고고문화로 보더라도 물길문화(만주족의 직접조상)의 분포범위는 지금의 길림시 이남 및 이서지역까지 미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는 물길인의 서진은 겨우 길림시 동북지역까지만 닿았고 속말말갈의 지역까지 점거하지는 않았음을 증명해 주고 있는 것이죠. 게다가 속말말갈의 족속은 <구당서>등의 여러 문헌에 모두 <고구려의 별종>이라 칭하고 있습니다. <무경총요>전집에는 더욱이 발해는 부여의 별종이다. 본래 부여의 땅이다 渤海 夫餘之別種 本夫餘之地라 했고 <속일본기> 권10에 대무예가 일본에 보내는 국서에 자칭 <부여의 풍속이 남아 있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책부원구>권 970에 속말말갈의 추장 돌지계가 수에 투항해 오자 그를 <부여후로 봉했다>고 했다.

<구당서 지리지>에 '신주는 속말말갈 오소고부에 두었다.
여주는 신주를 나우어 돌지계가 수에 투항해오자 그를 부여후로 봉했다고 했다'라 해서 속말말갈은 부여말갈이라고도 불렀음을 알 수 있죠. 속말말갈이 이미 '부여별종' '고려별종''부여의 풍속이 남아 있다' '추장을 부여후로 봉했다'고 한 등등의 기록은 모두가 속말말갈이 부여와 깊은 관련이 있음을 표명하는 말이다. 따라서 대조영의 출신종족인 속말말갈은 부여의 유민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발해는 부여유민(속말말갈) 옥저유민(백산말갈) 고구려유민이 주축이 되어 건국한 한국사의 정통왕조인 것입니다. 절대다수 고구려유민들이 주축이된 발해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라와 함께 병립한 남북국시대가 성립할 수 있죠. 예맥족은 한민족이기 때문이죠.


여진족은 불열이동의 흑수말갈 호실말갈 불열말갈등이 나중에 여진족이 되어지며 일부 발해유민들도 흑수말갈족에 융합되어지며 나중에는 만주족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만주족의 주축이 되는 족속은 당연히 숙신계인 흑수말갈이고 발해는 부여예맥계인 속말말갈 고구려유민들인 것이죠. 

http://blog.daum.net/hearo9mars/7072074


◆ 발해는 고구려어를 사용했다 = 발해가 국제 교류에서 고구려어를 사용했을 것이라는 주장이 새롭게 제기됐다. 고광의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은 “기록에 의하면 서기 739년 발해 사신 이진몽(已珍夢) 일행이 일본에 당도, 이듬해 정월 조회에 참석했는데 발해 사신과 함께 ‘신라학어(新羅學語)’라는 통역사가 나란히 서 있었다고 한다. 신라학어란 언어를 배우고자 신라로부터 일본에 파견된 학생으로 발해 사신의 통역을 담당하기 위해 배석한 인사였을 것이다. 이는 발해 사신과 신라학어의 언어가 서로 소통 가능했기 때문에 취해진 조치로서, 발해 사신이 신라어와 통하는 고구려어를 사용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당시의 사정으로 보면 발해 - 통일신라사이에는 하나의 민족으로 보는 정신적 흐름이 분명히 발견된다. 통일신라(統一新羅)는 발해를 북조(北朝), 또는 북국(北國)이라고 명백히 지칭하고 있다(『삼국사기』권 10 「신라본기」; 권37 지리지). 이 당시에도 상당한 공통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통일신라가 발해에 대하여 북조(北朝)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우리가 한반도 북쪽을 북한(北韓)이라고 부르는 것과도 다르지 않다. 즉 통일신라는 발해와 현재는 대립하고 있지만 결국은 통일이 되어야할 동족(同族) 전체의 일부라는 의식이 있었다.


참고로 인구학적으로 범위를 최대로 좁혀서 따진다면 남한은 신라의 후예라기 보다는 부여의 후예가 더 정확할 것입니다. 고구려와 백제 및 발해는 모두 부여에서 갈라져 나온 국가들이죠. 뿐만 아니라 현재 대한민국의 국명은 코리아로 불립니다. 이 역시 거슬러 올라가자면 고구려에서 유래된 말이죠.
인구 비율로 따져도 신라의 인구보다는 고구려와 백제 계통의 인구가 훨씬 더 우세했습니다.

실제로 삼국시대 신라의 인구는 백제의 인구 절반도 채 안 되었습니다. 다만 당나라의 개입으로 반도를 차지할 수 있어서 그렇지. 당나라의 개입이 없었다면 신라는 오히려 고구려-백제 연맹에게 복속되었을 겁니다. 그러니 남북국시대 신라의 인구에서 신라계는 적었습니다. 오히려 신라에 병합된 한반도 이북과 이남에 있던 고구려-백제계 백성들이 훨씬 더 많았죠.

이것이 나중에 중세고려가 일어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 발해의 국제교역로 = 발해가 ‘일본도(道)’ ‘신라도’ ‘등주도’ ‘영주도’ ‘거란도’ 등 다섯 개 교통로를 국제교역로로 이용했음을 사료를 통해 밝혀냈다. 특히 윤재운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은 “발해는 선박의 규모가 최대 300t에 이르는 해상무역의 강국이었다”며 “당나라에 120여 회, 일본에 34회의 공식 외교사절단을 파견했을 정도로 해외 교역도 활발했다”고 말했다.
참고로 신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의 산타마리아호는 150t의 카라크선(carrack 船)이다.


이외에도 임석규 조계종 연구원은 발해의 토기와 자기가 고구려의 것으로부터 시작해 당의 영향을 받았음을 규명했고, 전현실 박사는 발해의 주거문화가 고구려의 온돌 형식을 발전시킨 것임을 밝혔다.

“고구려, 중국 거치지 않고 서역과 문화 직교류” [중앙일보]

2009.06.22 01:50 입력 / 2009.06.22 09:00 수정



‘동아시아 고대 문화의 빛, 고구려’전 몽골 울란바토르서 출발

강서대묘 등 고분 벽화 활발한 교류 흔적 생생

눈을 ‘딱’ 감고 1500년만 거슬러 올라가 보자. 다시 눈을 뜬 당신 주변에 ‘금수강산’은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한반도 ‘삼천리’를 벗어나 북방 대륙, 대초원의 말발굽 소리가 귀에 쟁쟁할 것이다. 기원전 1세기에 건국해 서기 5세기에 동아시아 4강으로 군림한 나라. 유라시아 대륙 동·서 교류의 문화적 호수 역할을 했던 동북아의 패권국가. 당신은 고구려의 후예다. 고구려 고분벽화를 실물에 가깝게 재현한 그림이 16일부터 ‘몽골-투르크 벨트’ 첫 순회 전시회에 나섰다. 한국 외교통상부와 동북아역사재단이 주최한 이 순회전은 몽골에서 시작, 카자흐스탄과 키르기스스탄에서 고구려의 문화와 역사를 선보인다. ‘몽골-투르크 벨트’란 기원전 6세기부터 전(前)근대 사회까지 유라시아 북방을 가로지른 ‘문화 벨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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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고은은 몽골과 실크로드의 대사막들을 ‘내 정신의 숙영지’라고 읊었다. 한반도의 북방에서 동유럽까지 펼쳐지는 대초원이 그에겐 ‘꿈꾸는 대륙 공간’이었다. 고구려인들이 말 달렸던 북방 대륙, 그들이 무덤 속에서도 꿈꿨던 대륙 서쪽의 아득한 공간이 생생하게 담긴 고구려 벽화가 처음으로 몽골을 찾았다.

‘동아시아 고대 문화의 빛, 고구려’전이 16일 몽골 수도 울란바토르에 있는 몽골국립박물관에서 개막했다. 외교통상부·동북아역사재단·몽골국립박물관이 주최하고 중앙일보가 후원하는 행사다. 실물에 가깝게 복원한 덕흥리분·강서대묘 벽화를 중심으로 5세기 동아시아 4대 강국 중 하나였던 고구려의 문화를 소개하는 자리다.

몽골 전시를 시작으로 10월까지 카자흐스탄·키르기스스탄 등 이른바 ‘몽골-투르크벨트’를 순회한다. 중앙아시아의 사마르칸트에서 대초원을 지나 한반도를 거쳐 일본 열도까지. 고대 문명 교류의 중심지가 고구려였다. 그래서 이번 순회전은 적어도 1500년 이상을 거슬러 올라, 우리 문명의 시원을 찾는 여정이기도 하다. 몽골 현지 언론은 “5세기 때의 한국을 환영합니다”며 이번 전시를 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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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고분벽화전이 16일 몽골 울란바토르 국립박물관에서 개막했다. 전호태 울산대 역사문화학과 교수(맨 오른쪽)가 고구려 덕흥리 벽화(408년 축조. 북한 남포시 강서구역 덕흥동 소재)에 대해 몽골 관람객들에게 설명하고 있다. 사진 왼쪽에서 둘째가 어트겅바야르 몽골 교육문화과학부 장관. 그는 “몽골에서부터 고구려 벽화 전시를 시작하는 것은 두 나라의 긴밀한 관계를 더욱 돈독히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몽골 ‘조니 메데’ 신문 제공]


전시 기획을 맡은 전호태 울산대 역사문화학과 교수는 “고구려 벽화에는 중국을 거치지 않고 중앙아시아와 ‘초원의 길’을 통해 직접 교류했던 문화적 흔적들이 풍부하다”고 설명했다. 고구려의 고분벽화 속엔 당시 중국의 그림 속엔 드러나지 않는 인도·페르시아 계열의 회화 기법도 섬세하다. 예컨대 평양 천도 전 수도였던 국내성(현재 중국 지안)에 있는 장천1호분 천정부에는 하늘을 떠받치는 역사(力士)의 모습이 등장한다. 그리스 신화에서 두 어깨로 하늘을 메는 형벌을 받은 거인 신 아틀라스를 연상케 한다. 당시 고구려의 정치·군사적 ‘북방 동맹’을 뒷받침했던 문화적 ‘직교류’의 흔적일 수 있다는 것이 전 교수의 설명이다. 조선시대 이후 강화된 ‘중화중심적 사관(史觀)’ 속에서 이러한 개방적 정치·문화 교류의 역사와 그 중요성들이 희석돼 온 셈이다.

신연성 동북아역사재단 사무총장은 “이번 전시가 양국의 정치·경제 교류를 넘어 문화·역사에 대한 관심으로 심화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현재 몽골 인구 268만 명 중 1%가 넘는 3만4000여 명이 한국에 체류하고 있으며 한국에서 장기 체류 뒤 귀국한 이들만도 10만 명이 넘는다. 몽골 전시는 다음달 5일까지 계속된다.

몽골국립박물관 J.샤를보양 관장 “중국이 배제한 역사, 양국 공동 연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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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벽화전을 공동주최한 몽골국립박물관의 J.샤를보양(52·사진) 관장은 이번 전시를 통해 한국·몽골 양국의 문화적 유대가 깊어지길 기대했다.

그는 “고구려 무용총 벽화의 수렵도는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그림”이라며 이번 몽골 전시를 반겼다. 화가이자 시인인 그는 고구려 벽화가 가진 예술적 가치, 그 자체를 높이 평가했다. 16일 샤를보양 관장을 만나 이번 전시의 의미에 대해 물었다.

-몽골 일반 국민들에게 고구려 고분 벽화는 어떤 느낌일 것 같나.

“몽골인들에게도 고구려 벽화가 익숙하게 다가올 것 같다. 몽골 고유의 회화 방식은 하나의 평면에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를 펼친다. 고구려 벽화에 나오는 여러가지 생활사 그림과 신화적 상징물들을 몽골인들은 쉽게 읽어낼 수 있다.”

-전시의 의의는 무엇이라고 보나.

“중국의 역사서들은 ‘이민족’들의 역사를 축소하는 경향이 있다. 이에 어떻게 대처할 수 있을까? 방법은 여러 나라의 학자들이 공동으로 연구·조사하는 것이다. 그 결과가 중국의 서술과 달리 나온다면 공식적 역사 기록도 달라져야 할 것이다. 이번 고구려 전을 계기로 몽골과 한국 사이에 학술교류가 더 깊어질 수 있길 바란다.”

-예를 들자면.

“‘흉노(匈奴)’는 중국 역사에서 작은 지역을 지배한 이민족으로 묘사된다. 2011년이면 제국 성립 2220주년을 맞는 흉노는 몽골 지역을 포함해 고대 중앙아시아 세계를 제패한 대제국이었다. 세계적 학자들의 최근 연구 결과에 따르면, 여러 인종들로 구성된 흉노 세력은 기원 전후 동·서 문명 교류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된다. 중국의 시각에서 제외됐던 역사를 복원하는 국제적 작업이 성과를 거둔 셈이다.”
 

울란바토르서 한·몽 학술대회 “고조선은 흉노의 우익이었다”

한국과 몽골은 1997년 몽골에서 고고학적 조사를 실시한 이래, 선사시대 암각화 조사와 흉노시대 무덤 발굴 등 다양한 공동 학술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이번엔 고구려 벽화 전시회에 맞춰 현지에서 ‘한·몽 관계의 재조명’이란 주제로 16~17일 국제 학술대회를 열었다. 양국의 언어·역사·고고학 분야 학자들이 모이는 행사로 지난해에 이어 두 번째다.

윤형원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은 신라와 흉노의 무덤을 비교한 논문을 발표했다. 윤 연구관은 “흉노는 중앙아시아에서 처음으로 대제국을 건설한 세력”이라며 “당시 중국 한나라는 고조선을 ‘흉노의 우익’으로 두려워해 고조선을 멸망시키는데 주력했다”고 설명했다. 우리와 흉노의 역사적 관련성에 주목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는 황남대총 등 신라 무덤에 나타나는 이중의 목곽·목관 배치가 흉노 무덤과 상당한 유사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몽골 과학아카데미 역사연구소의 촐몬 박사는 13~14세기 고려-몽골의 문화 교류를 고찰했다. 당시 ‘칸들의 질병’이라 불리던 왕족들의 통풍(痛風)을 치료하기 위해 고려의 약재용 생선이 널리 사용됐다고 한다. 또, 몽골 제국이 1289년 프랑스 국왕에게 보낸 외교문서는 아직도 실물이 보존돼 있는데, 그 재질이 ‘고려 종이’라는 국제 학계의 견해도 있다. 촐몬 박사는 “당시 고려의 우수한 문물이 몽골 제국을 통해 세계 각지로 전파되는 등 문화교류가 활발했다”고 지적했다.

이평래 한국외대 역사문화연구소 교수는 1920년대 몽골 외무부 문서 중 한국 관련 자료를 소개했다. 몽골은 1921년 소비에트 적군과 연합해 중국군을 몰아내고 독립을 선포했다. 몽골은 전세계에서 두번째로 공산정권을 수립했던 국가다. 소비에트와 가까웠던 몽골에서 다수의 한인 독립운동가들이 활동했다. 여운형(1886~1947), 김책(1903~51) 등도 몽골에 체류했던 대표적 인사들이다.

울란바토르(몽골)=배노필 기자

 

 우리의 뿌리와 관련하여 특이한 나라 중의 하나가 신라입니다. 부여 - 고구려 - 백제 - 일본 등은 여러 가지의 기록들이나 사료들이 있어서 어느 정도 확인이 가능하지만 신라는 좀 다릅니다. 신라(新羅)의 기원이 어딘지를 알기도 어렵고 이들의 고분들 속에서는 기원이 불투명한 유목민 유물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기원을 알 수 없는 신라의 유물은 로마나 유럽에서 출몰한 훈족의 유물과 매우 유사하여 큰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신라에 결국은 병합되었지만 한반도 남단의 가야고분에서는 순장된 사람의 흔적도 있고 말들도 묻혀 있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유목민들의 매장풍습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그뿐만 아니라 경상도 출토 유물 중에는 기마부족이 사용하던 마구가 고구려벽화의 실물과 유사한 경우가 있었죠. 그래서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그 동안 많은 주장들이 있었습니다.
 
  이도학 교수는 4세기 경 고구려군이 한반도 남부 지역을 정벌했을 때 울주·동래 등에서 6세기 중반까지, 일부 지역에서는 장기간 상주했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이도학, 「고구려의 낙동강유역진출과 신라·가야경영」 『국학연구』 1988). 그리고 신라의 김씨 왕실이 시베리아의 기마민족에서 유래하였다거나 선비의 한 부족인 모용황이 고구려를 침공할 당시 모용황의 군대 중의 일부가 남하하여 신라를 지배하고 가야 지역까지 점령했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비슷한 얘기지만 금관가야 건국도 흉노에 의한 것이라는 견해도 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판단해야할지 어려운 문제들입니다.
 
  일단 신라에 대해서 좀 더 소상하게 알아봅시다.
 
  『삼국사기』에 신라를 구성한 6부족은 고조선(古朝鮮)의 유민들이라고 하고 있습니다(『三國史記』新羅本紀 始祖). 이 부족 가운데 고허촌장(高墟村長 : 후일 최씨)이 숲에서 말울음 소리를 듣고 들어가 보니 말은 간 데 없고 큰 알이 있어 그 알을 깨어보니 어린 아이가 나왔다고 합니다. 이 아이를 데려다 길렀더니 훌륭하게 성장하여 신라의 시조(박혁거세)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내용을 보면 기본적으로 신라는 외래 유이민이 건설한 나라가 분명해 보입니다. 특히 요동지역과 한반도 북부에서 이주한 세력이 신라를 구성했을 것이라는 점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력은 부여계의 이동만큼 조직적이지 못하고 고조선이 쇠망한 이후 그 유이민들이 흩어지는 과정에서 형성된 일종의 부족공동체 사회로 판단됩니다.
 
  초기의 신라는 그 세력이 미약하여 여러 소국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했습니다. 이익 선생이 쓴 글 가운데 "진한과 변한은 마한의 속국이었다(『성호선생전집』46)."는 말이 나옵니다. 물론 이 때의 진한과 변한은 신라와 일치하는 개념이라고 볼 수는 없겠습니다만, 당시에 신라는 남부여(백제)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대단히 허약했을 것입니다.
 
  역사적인 기록에 따르면 당시 한반도 남부는 마한 왕이 지배하고 있었는데 진(秦)나라 말기에 많은 사람들이 이주하여 마한왕은 그들이 진한지역에 정착할 수 있도록 도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북사(北史)』나 『수서(隋書)』의 기록에 위나라 장군 관구검이 고구려를 침공하였을 때(246) 초기에  일부 고구려인이 남하하여 신라의 지배층이 되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신라 김씨들의 특유한 묘제(墓制)로 이해되는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이 등장하는 것도 이 사건 및 미추왕(262~284)의 등장과 모두 시기가 비슷하여 어떤 큰 변화가 신라사회에 나타났다는 것이지요[정경희, 『한국 고대사회 문화연구』(일지사 : 1990)].     
 
  이 시기는 석씨에서 김씨로 왕위가 바뀌는 시기인데 신라의 외교노선이 친백제(親百濟)에서 친고구려(親高句麗)로 바뀌어졌다는 것입니다. 영락대제(광개토대왕)의 비문에도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가 매우 돈독했음을 보여주는 대목들이 있습니다. 영락대제 비문 가운데 신라와 관련된 부분만을 추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백제와 신라는 옛적부터 (고구려의) 속민으로서 조공을 해왔다. … 영락 9년(399) … 신라왕이 사신을 보내어 아뢰기를 '왜인이 그 국경에 가득 차 성지(城池)를 부수고 노객으로 하여금 왜의 민으로 삼으려 하니 이에 왕께 귀의하여 구원을 요청합니다.'라고 하여 태왕이 신라왕의 충성을 갸륵히 여겨, 신라사신을 보내면서 이에 대해 대비를 시켰다. 영락 10년(400) 경자년에 왕이 보병과 기병 도합 5만명을 보내어 신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고구려군이) 남거성(男居城)을 거쳐 신라성(新羅城)에 이르니, 수많은 왜군이 진을 치고 있었다. (고구려) 군이 도착하니 왜적이 퇴각하였고 이에 추격하여 임나가야(任那加羅)의 종발성(從拔城)에 이르니 성이 곧 항복하였다."
 
  위의 내용을 보더라도 신라는 고구려와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었고 영락대제 시기에는 사실상의 속국, 또는 고구려의 보호국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입니다.
   
  금관의 나라, 신라
 
  초기 신라에 대한 기록은 많이 부족한 편이라 다른 나라들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알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신라는 박혁거세(朴赫居世) 거서간(居西干)이 기원전 57년경에 건국한 다음 기원후 1~2세기 경 지금의 경북지방과 경남일대를 무력으로 정복함으로써 영토를 넓혀갔다고 합니다. 이 같은 기록들은 다소 과장된 것으로 보입니다.
 
  3세기 후반에 저술된 중국 진수의 『삼국지(三國志)』에는 신라가 진한(辰韓)을 구성한 12국 가운데 작은 나라의 하나에 불과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5세기 초 신라는 고구려의 군사적인 지원을 받으면서 대외적인 성장을 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로써 고구려가 신라에 대해 정치적으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다가 5세기 중엽 이후부터는 고구려의 통제를 서서히 벗어나고 있습니다. 그 후 6세기에 들면서 우경(牛耕)이 실시되어 농업생산력이 증대하고 불교가 공인(527)됨으로써 새로운 국가로 발돋움하는 계기를 만들고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일본서기(日本書紀)』의 기록입니다. 이 책에서 "신라는 눈부신 황금의 나라(『日本書紀』卷八 「仲哀紀」)"라고 말하고 있지요. 그러나 『삼국지』의 기록에는 "(삼한의 생활상을 보면) 구슬을 귀하게 여기고 금·은과 비단을 보배로 여기지 않았다(『三國志』魏書 東夷)."고 합니다. 그런데 같은 책 『삼국지』에서 고구려는 공식적인 복장에서는 금·은으로 장식하고 부여의 경우에도 금·은으로 모자를 장식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초기의 신라와 중기 이후의 신라에는 상당한 정치적 변화가 있었다는 말이 됩니다.
 
  즉 고구려계가 신라를 지배하게 됨으로써 신라는 고구려의 정치적 영향뿐만 아니라 문화적 영향을 상당히 받은 것이라고 봐야할까요? 앞서 본 영락대제의 비문도 그렇고 말입니다.
 
  그러나 이상합니다.
     
  정치적으로 고구려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은 분명한데 금(gold) 문화에 관한 한, 신라는 고구려의 수준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세련되어있을 뿐만 아니라 그 형태도 많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적어도 문화적인 측면에서는 신라가 고구려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 같지는 않고 정치적으로만 영향을 받은 듯 하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신라가 고구려에 정치적으로 크게 의존하던 시기 이전에 이미 세련된 '황금(黃金)의 문화'가 있었다는 말인데요.
 
  그런데 이 금(金) 문화라는 것은 바로 알타이를 고향으로 하는 북방유목민들의 대표적인 브랜드(상표)가 아닙니까?
 
  구체적으로 보면 금관은 마립간 시대(417~514), 즉 눌지 마립간에서 지증 마립간 시기에 집중적으로 출토된다고 합니다[조유전·이기환, 『한국사 미스터리』(황금부엉이 : 2004) 88쪽]. 그러니까 5세기를 전후로 해서 신라의 지배층의 변화가 있었고 그 지배층이 고구려나 백제보다도 유난스러울 만큼 금을 중시한다는 것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알려진 금관(金冠)은 모두 합하여 봐도 10여 점인데 한국에서 출토된 금관이 무려 8점이라고 합니다. 가장 먼저 출토된 금관총의 금관을 비롯, 금령총·서봉총·천마총·황남대총 등 출토지가 분명한 것과 나머지 3개는 경주 교동에서 도굴되어 압수된 교동금관, 호암 미술관 소장 가야금관, 도쿄의 오쿠라 컬렉션(도굴품) 등이 있습니다[조유전·이기환, 앞의 책, 88쪽].
 
  원래 금으로 몸을 치장하는 풍습은 고대 유목민족 사이에 크게 유행한 것이라고 합니다. 흉노족이나 선비족, 거란족의 무덤에서 황금 유물, 또는 머리장식이나 금관 등이 자주 출토되고 있습니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신라나 가야의 고분에서 나타나는 금관은 알타이 문화권인 만주·몽골·알타이·카자흐스탄 등의 지역에서 금으로 장식한 모자가 많이 발견되지만 인디아·태국·인도네시아·라오스·베트남 등과 같은 동남아시아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고 합니다[김병모,『금관의 비밀』(푸른 역사 : 1998)].
 
  아시다시피 신라의 금관(金冠)은 나무와 사슴의 뿔 모양처럼 생겼는데 흑해 북쪽 해안 지방인 사르마트(Sarmat)에서 발견된 금관과 유사한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사르마트 금관은 그리스풍의 옷을 입은 여인이 있고 가운데 가장 큰 나무를 중심으로 생명수를 표시하는 나무와 사슴 등이 만들어져 있고 신라의 금관처럼 수많은 나뭇잎이 매달려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신라 금관을 가장 직설적으로 묘사한 것처럼도 느껴집니다.
   
 사르마트 금관(흑해 북안의 로스토프 지역)    국립중앙박물관 『스키타이 황금』(276-267쪽에서 재구성)
 
  또 신라 금관과 유사한 다른 것으로는 아프가니스탄 틸리아 테페(Tillya Tepe)에서 발견된 금관을 들 수 있겠습니다. 대체로 1~2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주로 나무 장식으로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금테두리를 금꽃(金花) 스무 송이로 작성하고 있습니다. 높이는 13cm 정도로 작은 것이라 여성용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내몽골의 아로시등(阿魯柴登) 유적에서 출토된 금관은 독수리가 날개를 편 형상을 하고 있습니다. 이 금관은 신라의 금관과는 다른 형태이지만 독수리를 숭상하는 일면을 볼 수 있으므로 전통적인 동이(東夷)의 토템을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참고로 신라 금관 가운데서도 새가 나타나는 경우가 있습니다(뒤에 설명).
   
  그리고 고구려와 기원이 동일한 탁발선비족(타브가치 : 북위 건설)의 금관 장식은 신라의 금관과 이미지가 대단히 유사합니다. 타브가치는 몽골만주 계열로 그들의 유적지인 서하자향(西河子鄕)에서 출토된 금관 장식은 소머리, 또는 사슴의 머리 위에 나뭇가지의 형상을 한 것입니다. 이 장식은 신라 금관과 같이 샤먼적 분위기를 물씬 풍깁니다.
   
  고구려의 경우 평양의 청암리에서 출토된 금동관(金銅冠)은 고구려를 대표하는 왕관으로 알려져 있고 불꽃이 활활 타오르는 속에 인동초가 피어오르는 모습으로 백제의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것과 유사하다고 합니다.
   
  이 분야의 전문가인 이한상 교수(동양대)에 따르면 신라 금관의 기원이 정확히 어딘지 알기는 어렵다고 합니다.
 
  다만 선비족들의 금제 관식이 금이라는 재질과 나뭇가지를 머리에 장식한다는 측면에서 그 유사점을 찾아서 최병현 교수(숭실대)는 신라의 마립간 시대에 기마민족들에 의한 왕족 교체설을 제기하기도 합니다.
 
  신라시대의 김씨 왕족들이 등장하던 4세기 중반에서 6세기까지의 왕호는 마립간(麻立干)인데 이 말은 마루(宗) + 칸(王)의 의미로 추정되며 여러 부족 가운데 중심이 되는 우두머리라는 의미로 해석됩니다.
 
  그런데 신라의 금관은 이러한 금관들의 영향을 모두 받은 듯하면서도 각 금관의 아름다운 요소들을 소화해내고 추상화(抽象化)하여 가장 아름답게 예술적으로 승화(昇華)시킨 듯합니다.
 
  신라 금관은 스키타이 문화에도 나타나는 녹각수지형(鹿角樹枝形 : 사슴뿔 모양)과는 달리 사슴의 뿔과 나무를 동시에 형상화한 느낌이 있습니다. 요즘 고고학자들은 신라 금관의 형식을 직각수지형(直角樹枝形 : 나무 가지 모양)이라고 보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단순히 나무만을 형상화했다기 보다는 순록의 뿔도 함께 형상화하여 우두머리[長]를 동시에 의미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리고 이 금관은 수목숭배(樹木崇拜)의 전형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타브가치의 금관 장식[서하자향(西河子鄕) 출토]의 경우를 봐도 사슴의 뿔과 나무의 역할을 동시에 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 유물에서 사슴의 뿔 가운데 나무가 있죠? 그런데 신라의 금관도 같은 구조로 되어있습니다.
   
  신라 금관의 구체적인 형태를 보면, 윗부분은 나무와 사슴의 뿔을 추상화 시켰고 금관을 지탱하는 관(冠)은 사르마트와 틸리아테페의 형태와 유사하고 금관을 고정하는 것은 고구려의 금관과 유사합니다. 그리고 선비족들의 보요관도 추상화되어 나무와 결합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시베리아의 은제관(러시아 알렉산드로플 출토)과 수목형 금관(러시아 돈강의 노보체르카스트 출토)과도 유사한 특징이 나타난다고 합니다. 금관에 붙어있는 둥근 잎새 모양의 구슬을 꿴 장식들[영락(瓔珞)]도 동아시아에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라고 합니다. 즉 흉노의 흔적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신라의 서봉총(瑞鳳塚)은 조생부인(鳥生夫人)의 무덤으로 세 마리의 새가 장식된 금관이 출토되었고 천마총과 금관총, 황남총의 금관 장식도 새의 날개 모양이 있습니다. 새는 동이(東夷)의 대표적인 표상이기도 합니다. 이 조생부인은 신라 왕통의 대표적인 사람이라고 합니다. 조생부인은 지증왕의 어머님으로 눌지 마립간의 따님이자 자비마립간의 동생이며, 소지왕의 고모님으로 전문가들에 따르면 성골(聖骨) 중의 성골(聖骨)이라고 합니다(혹시 샤먼은 아니었을까요?).
 
  신라 금관은 하나같이 많은 곡옥(曲玉)들이 있는데 전문가들에 따르면, 이것은 태아(胎兒)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으로 생명과 다산(多産)의 상징이라고 합니다. 이 곡옥은 알타이의 파지리크 고분에서도 나타난다고 합니다. 결국 신라 금관들이 만들어진 의도와 그들의 이데올로기는 신라 금관이 출토되고 있는 적석목곽분과 함께 신라가 흉노들의 후예들임을 확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상의 논의를 보면 신라의 금관은 중앙아시아나 알타이 몽골 만주 지역에 나타난 여러 형태의 금관의 아름다운 요소들을 모두 소화해내고 추상화(抽象化)하여 가장 아름답게 예술적으로 승화(昇華)한 것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신라 금관의 모습은 가야의 금관과도 유사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초기에는 가야와 신라는 같은 계열로 볼 수도 있습니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가야와 신라의 관계를 보여주는 것 가운데 전기가야 토기문화와 신라의 4세기 이전 토기문화가 대체로 일치하며, 철기문화의 특징도 두 지역이 동일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것은 당시 경상 남·북도지역의 진한과 변한에 문화의 공통적인 기반이 존재하였음을 반영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東夷들은 하늘과 땅을 매개하는 것이 바로 나무와 새라고 봅니다. 다시 말하면 東夷의 문양을 구성하는 기본 요소는 나무와 새라는 것입니다. 이 점은 이미 앞에서 충분히 얘기했지만 좀 다른 각도에서 간략히 짚어보고 넘어갑시다.
  
  첫째, 나무 이야기입니다. 東夷의 나무와 관련하여 심도 있는 이야기를 하는 학자가 있었죠? 바로 존 코벨 선생입니다.
 
  존 코벨 선생은 북방 유목민들은 순록 사슴과 우주 수목을 가지고 이 세상을 이해했다고 합니다. 즉 신화에 따르면, 순록의 황금 뿔 때문에 해[太陽]가 빛나고 순록사슴 그 자체가 햇빛의 운행과정을 나타낸다는 말이죠. 그리고 금관에 있는 나무는 영험한 힘을 가진 나무로 하늘[天]을 향해 뻗어 오른 나무를 말하는데 존 코벨 선생은 이들 나무가 북방지역에 많은 흰 자작나무라고 말합니다[존 카터 코벨, 한국문화의 뿌리를 찾아  학고재 : 1999), 150~155쪽.].
 
  그런데 경주나 가야 지역은 흰 자작나무가 자랄만한 곳은 아니죠. 그런데 그 금관에는 이 흰 자작나무의 장식이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바로 그것이 이들이 북방에 살았던 흔적이라는 것입니다. 참고로 말씀드리면 자작나무는 타이가 지대나 그 주변지역에서 신목으로 숭배되는 나무라고 합니다(소나무나 상수리나무는 흑룡강 하류 지역과 한반도, 버드나무는 초원지대나 초원과 삼림이 혼재된 지역에서 주로 숭배된다고 합니다).
 
  존 코벨 선생은 신라의 문화와 시베리아의 문화는 비슷한 점이 많으며, 금관이 대표적인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금관은 샤머니즘의 흔적, 즉 무속 예술품이라는 것입니다. 금관에서 나는 경이로운 소리가 악을 물리치는 힘의 상징이며 금관을 쓴 사람의 움직임에 따라 옥과 금판으로 된 수백 개의 장식이 미세한 움직임과 반짝이는 빛을 냅니다.
 
  둘째, 새에 대해 이야기 해봅시다. 알타이 문화권 전역에는 위대한 인물의 탄생과 죽음에는 새가 등장합니다. 유네스코 국제 박물관 협의회(ICOM)의 서울 총회 기념로고(2004)는 솟대였지요. 이것은 바로 일본의 '도리'와 같은 형태입니다. 우리 눈에 가장 익숙한 것은 고구려 고분벽화에 등장하는 해(太陽) 속의 세 발 달린 까마귀[삼족오(三足烏)]일 것입니다.
 
  김병모 교수는 카자흐족의 민속신앙에 위대한 샤먼의 탄생과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아기를 낳고 싶은 여인이 커다란 나무 밑에서 몇 시간이고 기도를 한다. 그 간절한 소원이 하늘의 절대자에게 전달되면 새들이 날아와 나무 위에 앉는다. 그러면 그 여인이 잉태한다. 엑스터시 과정이다. 그런 과정으로 태어난 아이가 커서 위대한 지도자가 된다(김병모, 「고고학 여행」)."
 
  김병모 교수에 따르면, 카자흐스탄의 알마타 동쪽 이시크(Issyk) 고분(B. C. 3세기경)에서 발견된 여인은 금으로 만든 솟대를 모자에 달고 있었는데, 그 모양이 신라 금관의 디자인과 똑같다고 합니다.『삼국지』에는 "변진(弁辰)에서 대가(大家)가 죽으면 대문에 새의 날개를 달았다(『三國志』「魏書」東夷傳)."고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죽은 자의 영혼이 하늘로 날아간다는 의미겠죠. 경주 서봉총(瑞鳳塚) 신라 금관도 머리 부분에는 세 마리의 새가 앉아 있는데 이 또한 하늘나라로 영혼을 인도하는 새들이라고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알은 태양의 또 다른 모습이라고 할 수 있겠죠? 즉 새와 태양에서 알이 나오는 것이라는 말도 되지요. 그렇다면 부여·고구려·신라·가야 등의 신화에서 나타나는 알의 이미지는 결국은 같은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東夷의 종교 및 정치적 수장인 샤먼의 지팡이의 머리에 달린 장식은 바로 솟대라는 것이지요. 솟대 위의 새는 인간과 절대자를 연결하는 매개자라는 애깁니다.
     
  신라의 금관은 바로 신라인들의 정체성과 이데올로기를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신라인들은 고구려나 백제 등 한겨레의 어떤 나라보다도 알타이적인 요소가 강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신라의 무덤 양식도 이 점을 강하게 시사합니다. 미추왕 이후 신라 김씨 왕족들의 무덤[천마총(天馬冢)이라든가 황남대총(皇南大冢) 등]은 전형적인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인데 이러한 양식은 알타이를 역사적 무대로 삼았던 이른바 흉노의 무덤과 흡사하다는 것이지요. 문제는 이러한 형태의 목곽분이 이전에서부터 있어온 것이 아니라 4세기 초에 갑자기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라의 금관 중에 순금제는 모두 적석묘에서만 발견된다고 합니다. 금관의 제작 시기는 5~6세기로서 주인공들은 모두 김(金)씨계 인물들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3세기 말에서 4세기 초부터 일어난 동아시아 기마민족 대이동의 와중에서 한 여파가 밀려온 결과[최병현,『新羅古墳硏究』(일지사 : 1988)]"라는 견해가 있습니다. 즉 사마염이 건국한 진(晋)나라가 '팔왕의 난'으로 약화되면서 東夷족들이 대규모로 남진해 오고(5호16국 시대), 그들의 일부가 경주까지 내려와 김씨(알타이, 또는 아이신) 왕조를 세웠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신라는 흉노계로, 오르도스 철기 문화의 주인공들이 한(漢)의 팽창으로 일부는 유럽 쪽으로 가서 헝가리 건국의 주체가 되고 동쪽으로 이동해가서 한반도와 일본의 건국 주체가 되었다고 합니다[이종선,『古新羅 王陵硏究』(학연문화사)].
 
  글쎄요. 이런 분석들은 과연 사실일까요? 제가 보기엔 4세기에 벼락처럼 나타난 것은 아닌 듯한데요. 일단 이 의문들을 푸는 문제는 뒤로 미루고 계속 다른 연구자들의 견해를 들어보지요.
 
  이종호 박사는 신라와 흉노의 유물은 서유럽 훈족에게서 발견되는 유물들과 상당히 유사하다고 합니다. 이 내용은 독일 텔레비전 방송에 소개되었습니다[이종호,「게르만 민족 대이동을 촉발시킨 훈족과 韓民族의 親緣性에 관한 연구」『백산학보』66호].
 
  이 프로그램의 제작자인 PD 베렌트와 슈미트 박사가 한민족과 훈족의 직접적인 연계 증거로 제시한 것은 엉뚱하게도 청동으로 된 솥입니다.
 
  청동 솥은 훈족의 이동 경로에서 발견된 유물인데 가야 지방에서 발견되고 그 형태가 신라의 유물에서도 발견된다는 것이지요. 훈족은 이동식 취사도구인 청동 솥을 말의 잔등에 싣고 다녔는데 재미있는 것은 신라의 기마인물상(국보 91호)이 바로 그 형태라는 것입니다(요즘으로 치면 차 뒤 트렁크에다 버너와 코펠을 싣고 다니는 것이지요). 청동 솥에서 발견되는 문양이 한국의 머리 장식에서도 많이 보인다고 합니다. 그들은 또 이 외에도 여러 가지 증거를 들고 있습니다.
     
기마 인물형 토기(국보 91호)   
 
 이것은 신라인들이 서유럽까지 갔다기보다는 흉노의 일부는 서유럽 쪽으로 가고 일부는 남진하여 경주·가야 등으로 내려온 것으로 보입니다.
 
  어떻게요? 흉노가 한반도의 남단인 신라로 들어 왔다고요?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에 둘러싸인 마치 섬과도 같은 지역인데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요?
 
  그 의문들이 최근 들어서 많이 풀리고 있습니다.
 
  최근 신라 건국의 비밀을 풀기 위한 많은 연구들이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한 것은 바로 사천왕사에 있는 문무대왕의 능비(陵碑)에 있는 비문의 내용입니다.
 
  흉노의 나라, 신라
 
  문무왕의 능비(陵碑)에 "투후제천지륜전칠엽(秺侯祭天之胤傳七葉)"이란 대목이 나오는데 바로 이 말이 신라와 흉노와의 연계성을 밝혀주는 가장 큰 단서입니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투후제천((秺侯祭天)이라는 말은 흉노 단군(제사장) 출신의 제후인 김일제(金日磾)를 가리킨다고 합니다. 그래서 위의 비문은 "김일제(金日磾) 이후 7대가 흘렀다"는 말입니다. 이 비문에서 문무왕은 자신의 선조가 이 김일제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죠. 조금 구체적으로 한번 봅시다.
 
  신라계 경주 김씨들은 시조를 '김알지(金閼智)'라고 하고 가락계인 김해 김씨들은 시조로 가락국의 시조인 '김수로(金首露)'를 들고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금궤에서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들 이전에도 김씨 성을 가진 사람이 바로 김일제라는 것[文定昌, 『가야사』(백문당 : 1978)]인데 이 김일제라는 분이 바로 (김수로와?) 김알지의 선조라는 얘깁니다.
 
  한무제(漢武帝) 당시 곽거병(霍去病·140∼117 BC)은 흉노 정벌에 휴도왕(休屠王)을 죽이고 휴도왕의 아들인 김일제(金日磾)와 그의 가족을 포로로 잡아왔는데 이 휴도왕의 아들을 한무제가 특히 아껴서 김씨 성을 하사하고 측근에 둡니다. 한무제는 어린 시절을 외롭고 불우하게 보낸 사람이어서 어떤 의미에서 김일제와 비슷한 환경에서 자란데다 김일제는 한무제의 생명의 은인(한무제 암살을 막음)이기도 하니 특히 김일제를 총애한 듯합니다.
 
  당시 휴도왕(김일제의 아버지)은 돈황에 가까운 깐수성 지역을 다스린 사람이었는데 이웃 왕이었던 곤사왕(昆邪王)의 계략에 빠져 죽고 김일제와 동생 윤(倫), 그의 어머니 알지(閼氏)가 곽거병에게 포로로 잡힙니다. 이 김일제의 일대기는 『한서(漢書)』에 상세히 기록되어있습니다(『漢書』金日磾傳 ).
 
  현재 김일제의 묘소는 서안(西安)에서 서쪽으로 40km 떨어진 한무제의 능(무릉 : 茂陵) 가까이에 초라히 묻혀있다고 합니다[섬서성(陝西省) 흥평현(興平縣) 남위향(南位鄕) 도상촌(道常村)]. 김일제에 대해 중국 측에서는 "흉노왕의 태자로 비록 잡혀와 노예가 됐지만 한무제에게 충성을 다한 공으로 '투후(秺侯)'라는 천자(天子) 다음으로 높은 벼슬을 받을 수 있었고, 죽어서는 제왕이 누워 있는 능의 옆에 묻힐 수 있는 영광을 누리게 됐다."라고 합니다[김대성, "흉노왕의 후손 김일제 유적을 찾아서"「韓國김씨 시조」『신동아』 1999년 8월호]. 여기서 말하는 투후(秺侯)는 제후국의 왕이라고 합니다. 문무왕의 비문에는 "투후는 하늘에 제사지내는 사람의 후손이다(秺侯祭天之胤)"이라고 합니다. 『한서(漢書)』에는 휴도왕이 금인(金人)을 만들어 하늘에 제사[祭天]한 까닭에 김씨의 성을 주었다고 합니다.
     
  지금까지의 내용을 보면서 좀 이상한 대목들이 있지요?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인 김알지(金閼智), 즉 경주 김씨의 시조와 유사한 이름이 나오지요? 무언가 관계가 있을 것도 같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이 김일제라는 이름이 문무대왕(661~681)의 선조라는 이름으로 나타나기 때문이죠.
 
  여기서 잠시 김일제의 후손들을 한번 알아봅시다. 『한서(漢書)』에 의하면, 한나라 원제(元帝) 초에 김일제의 차남인 김건(金建)의 손자 김당(金當)을 투후로 봉하여 김일제의 뒤를 잇게 했고 다시 김당의 아들인 김성(金星)이 투후를 계승합니다(『漢書』金日磾傳 ).
 
  여기서 문무왕 선조의 계보를 기록하고 있는 문무왕의 비(국립 경주박물관 소재)의 내용을 좀 더 상세히 보도록 합시다.
 
  "우리 신라 선조들의 신령스러운 근원(靈源)은 먼 곳으로부터 계승되어온 화관지후(火官之后)이니, 그 바탕을 창성하게 하여 높은 짜임이 바야흐로 융성하였다. 큰 마루(宗)가 정해지고 그 갈래가 형성되어 투후는 하늘에 제사지낼 아들로 태어났으며 이제 7대를 전하고 있다. 15대 조 성한왕(星漢王)은 하늘에서 바탕을 내렸고 … 진백(秦伯)의 바탕이 되는 덕이 다시 일어났다 … 장례(葬事)는 간소하게 하여 서역식으로 다비하고 동쪽 바다에 띄우라. 죽어서도 용이 되어 너희 나라를 지킬 것이니 … 경진(鯨津)에 뼛가루를 날리시니 대를 잇는 (새) 임금은 진실로 공손하도다. 우러나는 효성과 우애는 끝이 없었네."
 
  김대성 선생(한국문자학회 부회장)에 따르면, 위의 문무왕의 비문에 나타난 문무왕 선조에 대한 기록인 ① 화관지후(火官之后 - B. C. 2300년대), ② 진백(秦伯 - B. C. 650년대), ③ 파경진씨(派鯨津氏 - B. C. 200년대), ④ 투후(秺侯 : B. C. 100년대), ⑤ 가주몽(駕朱蒙 : B. C. 50년대), ⑥ 성한왕(星漢王: A. D. 20년대), ⑦ 문무왕(文武王 : 661~681) 등에서, ② 진백(秦伯)은 진시황제의 20대 선조인 진 목공(穆公)을 말하고, ③의 파경진씨(派鯨津氏)는 진나라가 망하면서 피난한 경진씨를 파견한 휴도왕, ④의 투후는 김일제, ⑥의 성한왕은 김일제의 4대손인 김성(金星)으로 이 성한왕이 바로 신라 김씨의 시조 김알지라는 것입니다[김대성, "흉노왕의 후손 김일제 유적을 찾아서"「韓國金氏始祖」『신동아』 1999년 8월호].
 
  그런데 김일제 이후 문무왕까지는 상당히 긴 세월의 터울이 놓여있지요? 그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을까요? 그리고 과연 여기서 말하는 성한왕(星漢王)이 바로 김알지(金閼智)였을까요? 이 점들을 간략히 보고 넘어갑시다.
 
  한(漢)나라는 당시의 이름 높은 신하였던 왕망(王莽 : B. C. 45∼23)에 의해 나라가 망하고 신(新)나라(8~23)를 건국하게 됩니다. 그런데 왕망은 바로 김일제의 증손자인 김당(金當 : 김성의 아버지)의 이모부였습니다.
 
  한나라 당시에는 음양오행(陰陽五行)과 선양(禪讓 : 평화적 정권교체)의 이데올로기가 크게 유행하였기 때문에 왕망은 쉽게 정권을 장악했지만 지나치게 교조적이고 고대 유교에 치우친 정책을 시행하여 결국 20년을 넘기지 못하고 망하게 됩니다. 이후 왕망은 중국사의 대표적인 역적 중의 한 사람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이러니 왕망의 외가(外家)였던 김일제 집안은 이제 중원에서는 발붙이기가 어렵게 되었죠. 아마 이 때 김일제의 후손들이 뿔뿔이 흩어진 듯합니다. 그래서 이후 이들 김일제의 후손들이 비교적 안전한 한반도의 남부로 피신했다는 말입니다. 연구자들은 오늘날 중국의 요서와 요동, 한반도의 서북과 남부 김해, 일본의 규슈 등지에 이 시대의 화폐인 오수전(五銖錢)이 광범위하게 출토되는 것도 이와 관계가 있을 것으로 보고 있기도 합니다.
 
  다시 문제는 성한왕이 김알지인가 하는 점으로 돌아가 보면 김알지라는 이름 자체가 김일제의 어머니(알지)와 유사한데다 대개 시기적으로 유사하기 때문에 다소 관련이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한서(漢書)』에 따르면, 김일제의 어머니는 두 아들(김일제와 김윤)을 잘 가르쳐 황제가 이 말을 듣고 가상히 여겼는데 김일제의 어머니가 병으로 죽자 어명으로 감천궁(甘泉宮)에 초상화를 그리게 하고 '휴도왕 알지(休屠王閼氏)'라고 표제를 붙였다고 합니다(『漢書』金日磾傳 ). 여기서 이제 한반도의 김알지가 출현하는 장면을 봅시다. 참고로 알지의 지(智)나 씨(氏)는 모두 음을 빌려 쓴 말이고 발음상으로 큰 차이가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김알지를 발견한 사람은 탈해 이사금(57~80)인데 『삼국사기』에 나타난 이 사건의 대목이 좀 이상합니다. 한번 보시죠.
 
  "(65년) 왕이 금성 서편 시림(始林)에 닭 우는 소리가 들려 새벽에 호공을 보내 살펴보게 하였는데 그 자리에 금궤(金櫃)가 있어 열어보니 사내아이가 들어있었다. 왕이 좌우에게 말하기를 하늘이 내게 준 아들이라고 하였다. 자라면서 총명하여 이름을 알지(閼智)라 했고 금궤에서 나왔기 때문에 성을 김씨로 하였다. 그리고 시림을 고쳐 계림(鷄林)이라고 하고 나라 이름으로 삼았다(『三國史記』新羅本紀 脫解尼師今)."
 
  위의 내용을 보면 금궤에서 아기가 나오니 자기의 아들로 삼고 나중에 나라 이름까지도 바꾼다? 이상한 일이죠. 금궤에서 나온 사람이니 토착민은 아니겠죠?(혹시 금 마차에서 내리는 사람을 묘사한 것은 아닐까요? 실제로 그런 구전도 있으니까요) 그런데 아예 나라 이름도 김알지를 상징하여 바꾸었다고 하니 뭔가 이상합니다.
 
  제가 보기엔 위의 기록은 김알지와 탈해이사금의 연합세력이 신라를 장악한 것을 표현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탈해이사금도 힘든 과정을 통해 왕이 되었으니 기반이 약했을 뿐만 아니라 상당한 반대 세력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 상태에서 김알지 세력이 탈해에게 많은 도움을 준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니 탈해 이사금은 김알지에게 왕위를 물려주려했겠지요. 이에 대하여 김알지가 양보했다고 합니다.
 
  그 뒤 김알지의 7대손인 미추 이사금(262~284)이 신라의 13대 왕으로 등극합니다. 따라서 김알지는 탈해 이사금을 보좌하면서 긴 세월동안 착실히 힘을 키운 것으로 보입니다. 인내심이 상당했던 모양입니다. 아니면 탈해에 대한 의리를 지켰겠지요.
 
  김병모 교수에 따르면, 왕망이 실각한 후 김일제의 일족들은 피의 숙청을 피해 자신의 고향인 휴도국(休屠國)으로 도주하여 성을 왕씨(王氏)로 바꾸고 살았다고 합니다. 이것은 휴도국 고지(故地)에 있는 비석으로 확인이 된답니다. 그리고 그 시기에 김일제의 후손 중 한 갈래가 신라로 들어오고, 그 내력이 문무왕의 능비(陵碑)에 새겨진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내용을 좀 더 깊이 살펴봅시다.
 
  김알지의 출생과 관련된 토템은 나무(木)라는 것입니다. 북방 초원지대에서 하얀 색깔의 자작나무(白樺樹 : 백화수)는 바로 생명(生命)을 의미하는 신수(神樹)라고 합니다. 일본이 신라(新羅)를 가리켜 시라기(白木)라고 부르는 것도 이 이유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계림(鷄林)이라는 말과 관련해 보면, 東夷 신앙에서 새는 인간과 하늘[天神]을 연결하는 매개체(媒介者)입니다. 즉 東夷 가운데는 조장(鳥葬)을 치르는 풍속이 있는데 이것은 새가 죽은 사람을 하늘나라에 운반해 준다고 믿기 때문이겠지요. 김병모 교수는 이런 내용의 기록들이 김알지의 사상적 고향을 암시해 주는 것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김알지의 성(姓)인 김(金)은 금(Gold)이고 이름인 알지(閼智)도 알타이 언어에 속하는 모든 종류의 언어에서 금(Gold)을 의미합니다. 즉 알타이 언어의 알트, 알튼, 알타이가 아르치, 알지로 변한 것이라는 얘깁니다. 그러니까 김알지는 금(金) + 금(金)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금궤라는 말도 "문자 그대로" 금궤로 이해해도 될 듯도 합니다. 즉 신라의 선주민들이 이전엔 한 번도 보지도 못한 화려한 각종 금세공 장식품들을 가득 담은 궤짝을 대단히 인상적으로 보았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들과 관련된 것은 모두 금궤로 기록되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사실로 말한다면, "금궤에 들어있는 사람"이 아니라 "금궤를 들고 온 이방인(strangers carrying golden chest)"이었겠지요. 아니면 금마차를 타고 온 이방인일 수도 있겠지요. 이전까지 신라지역 사람들이 중요시한 것은 구슬이지 금이 아니거든요.
 
  그러나 김알지가 성한왕인가에 대해서는 결정적인 자료가 없으니 일단은 연구과제로 두어야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김알지의 후손인 문무왕(태종 무열왕의 아들)이 자신의 선조로 김일제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으니 신라 왕계, 즉 경주 김씨가 김일제의 후손인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흉노 계열이므로 그들의 문화가 고구려나 백제를 거치지 않고 바로 전승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것이 신라 금관의 비밀을 푸는 열쇠이기도 하겠습니다.
 
  즉 김일제의 아버지인 휴도왕의 주요 활동 무대가 오로도스라는 것입니다. 알기 쉽게 이야기하자면 나관중『삼국지』에 나오는 東夷의 장수 여포(呂布)의 고향 가까운 곳이었단 말입니다. 현재로 본다면 란저우(蘭州) - 타이위안(太原) 북부 지역이라는 말이지요[정수일, 『고대문명 교류사』(사계절 : 2001) 262쪽]. 바로 몽골의 활동영역입니다.
 
  흉노는 스키타이와 더불어 유럽, 중앙아시아 - 중국을 연결하는 매개체였습니다. 즉 흉노는 알타이를 기반으로 하여 유럽, 중앙아시아와 중국을 연결하는 세력으로 때로는 중국과 교역하고 때로는 전쟁을 했다는 말입니다. 흉노는 동서를 연결하는 대표적인 상인 세력으로 중개무역을 주관했습니다. 마치 오늘 날의 한국이나 일본처럼 당시 흉노나 스키타이는 국제무역(중개무역)의 중심 세력의 하나였다는 것이죠[정수일, 『고대문명 교류사』249쪽 참고]. 그러니 흉노가 금을 중시할 수밖에요. 금은 매우 고가(高價)인데다 상대적으로 매우 가볍기 때문에 유목민들에게는 이보다 좋은 교역품이 없지요. 비유하자면 요즘의 반도체나 휴대폰과도 다르지 않지요.
 
  따라서 일반적으로 보듯이 3세기 말에서 4세기 초부터 일어난 동아시아 기마민족 대이동의 와중에서 한 여파가 밀려온 결과 그 기마민족들이 신라를 점령 지배하여 신라 왕족이 된 것이 아니라, 1세기경에 이미 신라에 와 있던 흉노 휴도왕의 아들(김일제)의 후손들이 점점 세력을 키워서 4세기경에 정권을 장악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초원길을 통하여 상당한 부분 중앙아시아나 유럽 쪽의 금장식 제품에 대해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졌거나 구매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시기적으로 보면 신라의 김씨 왕계는 북위나 고구려를 통해 초원길과 접촉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북위(386~543)의 시기와 신라의 마립간 시대가 대체로 일치합니다. 신라는 법흥왕(514~540) 때 비로소 중국(양나라)과의 교역로가 열립니다(522 : 법흥왕 8년). 이 시기부터는 금관도 사라집니다(아마 중국 문화의 영향을 받아서겠지요. 東夷 고유의 샤머니즘 전통도 약해져갔을 것입니다). 즉 금관은 마립간 시대[눌지 마립간에서 지증 마립간 시기(417~514)]에 집중적으로 출토됩니다[조유전·이기환,『한국사 미스터리』88쪽].
 
  그러면 김씨 세력이 신라에서 정권을 잡는 데 왜 이렇게 긴 시간이 필요했을까요?
 
  그것은 초기 신라 사회가 가진 복잡성(複雜性)에 기인한다고 봐야겠습니다(신라는 작은 나라지만 다른 나라들에 비해 훨씬 복잡한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① 신라 자체가 워낙 허약하여 오랫동안 외침에 시달리고 백제와 고구려의 속국 수준의 국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② 김일제의 후손들의 이동도 부여의 경우와는 달리 국가적 규모가 아니라 일종의 가문의 이동이었으므로 세력을 키우는 데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었고, ③ 부여처럼 6부 촌장의 연합체(고조선 유민)가 일찌감치 구성되어 이들 세력이 강력하였다는 점 등을 들 수 있습니다.
 
  위에서 말한 상황을 설명해 줄 수 있는 기록들이 『삼국사기』에는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남사(南史)』에 따르면, "신라는 절을 하는 등 살아가는 행태를 보면, 고구려와 서로 비슷하다. 신라는 문자가 없어 나무에 새겨 서로의 신표롤 삼는다. 그리고 말은 백제를 통해서 통역이 될 수 있다(其拜及行與高麗相類. 無文字, 刻木爲信. 語言待百濟而後通焉 : 『南史』「列傳」)"고 하고 있습니다.
 
  위의 기록은 위진남북조 시대의 기록인데 신라가 문화나 습속이 고구려와 매우 유사하며 말은 백제와 대단히 유사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신라의 기원이 된 6촌이 고조선 유민이라고 하니 그 고조선의 습속과 고구려의 습속 또한 차이가 없었다는 말이 됩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들 모두는 요동(遼東)을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나무에 새겨 신표로 삼는 것은 유목민들의 습속이기 때문에 『남사(南史)』의 기록은 신라가 고구려·백제와 더불어 한겨레의 나라임을 공식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사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한족(漢族)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삼국지』에 나타난 기록과 같이 진(秦) 나라에서 이주해온 신라의 일부 유민들도 진나라가 한족(漢族)의 나라가 아니므로 신라와 한족(漢族)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죠.
 
  여기서 신라와 진시황(秦始皇)의 진(秦)과의 연관성은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는 문제이니 한번은 거론해야겠군요.
 
  『삼국지』에는 "진한은 마한 동쪽에 있다. 이 나라 노인들의 말에 의하면, 옛날 진(秦)나라 때 사람들이 괴로운 노역을 피해 한(韓) 지역으로 도망쳐 들어갔는데 마한(馬韓)은 그 동쪽 땅의 일부를 그들에게 주었다고 한다. 그들은 성(城)과 울타리(柵)가 있었고 말하는 것이 마한과는 다르고 진나라 사람들이 말하는 것과 같다.『三國志』魏書 東夷傳 辰韓)" 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를 보면 진나라 유민들의 일부가 한반도 남부 지역으로 흘러 들어온 것 같습니다.
 
  『후한서(後漢書)』에도 "진한의 노인들 스스로 말하기를 진나라가 망해서 도망해 온 사람으로 피난 가는 것이 고역이라고 말했다. 한국(韓國)의 마한 땅이 적당할 것 같아서 마한의 동쪽을 나누어 같이 살았으며 말은 진(秦)나라와 비슷하여 그런 이유로 나라 이름을 '진한(秦韓)'이라고 하였다(『後漢書』東夷傳 辰韓)."라고 합니다.
 
  『삼국사기』에는 " 중국 사람들이 진나라 때 난리가 나서 시달려서 동쪽으로 오는 자가 많아서 대개 마한의 동쪽 땅으로 몰려들어 진한과 어울려 살더니 점차 성하게 되었다. 그래서 마한이 이를 꺼리어 신라에 대해 책망하였다(『三國史記』新羅本紀 弟1 始祖 38年)."라고 합니다.
 
  『삼국사기』의 기록과 『후한서』의 기록은 다소 차이가 있죠? 『삼국사기』(新羅本紀 弟1 始祖 38年)의 기록으로 보면 『후한서』의 기록과는 달리 진나라 사람들이 신라의 주 세력으로 자리 잡지는 못한 것으로 판단됩니다.
 
  『삼국사기』를 보면, 신라 제3대 유리왕 9년에 6부 촌장들에게 신라건국의 공로를 영원히 기리기 위하여 6부의 이름을 고치고 각기 성(姓)을 내렸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래서 양산촌장은 이씨(李氏), 고허촌장은 최씨(崔氏), 대수촌장은 손씨(孫氏), 진지촌장은 정씨(鄭氏), 가리촌장은 배씨(裵氏), 고야촌장은 설씨(薛氏) 등으로 성씨를 하사 하였다고 합니다(『三國史記』新羅本紀 儒理尼師今).
 
  그런데 위의 기록(진 나라 사람들의 이주)과 관련한 문제는 시기적으로 진나라 말기라면 B. C. 3세기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김일제와는 일단 무관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보아온 대로 진(秦)나라는 정통 중화를 표방하는 한족(漢族)과는 거리가 먼 민족입니다. 춘추 전국시대까지도 중국의 영역은 작아서 사마천의 『사기(史記)』에 "(초나라 왕이) 나는 야만적인 오랑캐[蠻夷]라서 중국의 호시(號諡)와 같을 수 없다(「楚世家」)." 라든가 "진(秦)나라는 중국의 제후들의 회맹(會盟)에 참여하지 못하고 오랑캐[夷翟]로 간주되었다(「秦記」)."는 말이 나오고 있습니다. 당시에는 진나라나 양자강 유역에 있던 초나라 등을 제외한 황하 유역의 국가들을 중국이라고 불렀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런데 우리를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신라 왕족인 김씨들도 진시황(秦始皇)과 연계를 시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진나라 자체가 흉노의 계열인 점도 있겠지만 이것은 간단히 해명될 문제만은 아닌 듯도 합니다.
 
  즉 신라 건국의 비밀을 밝히는 많은 견해 가운데 휴도왕을 진시황(秦始皇)의 아들인 부소와 연계를 시키는 견해도 있습니다. 진시황의 맏아들인 부소(扶蘇)는 당시 정치적 정변의 희생물이었지만 총명하고 용맹하며 충성심이 매우 강한 사람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참고로 전등사의 삼랑성(정족산성)을 쌓은 단군의 세 아들의 이름도 부소(扶蘇)·부우(扶虞)·부여(扶餘)라고도 합니다. 머리 아프죠? 일단 넘어갑시다].
 
  간단히 말하면 진(秦)과 신라(新羅) 및 금관가야(伽倻)의 지도층은 공교롭게도 그 조상을 모두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로 동일하게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소호씨(少昊氏)는 원래 동방의 큰 신으로 『산해경(山海經)』에 따르면 동해 밖의 먼 곳에 소호의 나라가 있고 그의 왕국은 온갖 새들이 나라를 다스렸다고 합니다[정재서,『이야기 동양신화』(황금부엉이 : 2004) 164쪽]. 한 마디로 '새의 나라'지요. 소호씨는 산동반도 - 요동 - 한반도 등(일반적으로 보는 동이의 영역)에 이르는 東夷의 영역과 관련이 있는 신입니다.
 
  후일 소호씨는 서쪽으로 가서 서방의 신이 됩니다. 그래서 가을의 신인 욕수와 더불어 서방을 다스립니다. 뿐만 아니라 북방에 사는 외눈박이 일목국(一目國 : 눈이 작은 흉노로 추정됨) 사람들도 소호씨의 후손이라는 것이죠. 쉽게 말하면 소호씨는 동이(東夷)와 서융(西戎), 북적(北狄)의 신이라는 것입니다(그래서 대부분 東夷의 시조들이 알에서 태어나시는 모양이죠?). 소호의 후손이 처음으로 활과 화살을 만들기도 합니다[정재서,『이야기 동양신화』163~165쪽]. 영락없는 쥬신의 신입니다. 이 점을 좀 살펴봅시다.
 
  먼저『좌전(左傳)』에 따르면 "진(秦)은 소호(少昊)씨의 후예다."라고 합니다. 다음으로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을 보시죠.
 
  "신라 사람들은 스스로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의 후손이어서 성(姓)을 김씨로 하였다(新羅人自以少昊金天氏之後 故姓金氏 : 『三國史記』百濟本紀 義慈王)"
 
  이 기록은 경주 김씨였던 김부식(『삼국사기』편찬자)이 여러 가지 정황을 종합하여 내린 결론을 쓴 것으로 보입니다.
 
  일단 기록만으로 나타난 것을 토대로 퍼즐을 맞추어 보면
 
  진시황(秦始皇) → 부소 → 휴도왕 → 김일제 → 김알지 → 내물왕 → 문무왕
 
  등의 계보가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점 하나가 있습니다. 『삼국사기』에는 김유신의 12대조는 수로왕인데 황제(黃帝) 헌원의 후예요, 소호의 직계라고 합니다. 따라서 가야와 신라는 동일한 근원에서 나왔다고 강조합니다(羅人自謂少昊金天氏之後 故姓金 庾信碑亦云 軒轅之裔 少昊之胤 則南加耶始祖首露 與新羅同姓也 :『三國史記』金庾信列傳). 그런 면에서 보면, 김일제의 후손이 한쪽으로는 가야로 가고 한쪽은 신라로 왔다는 일부의 주장이 사실일 수도 있겠군요.
 
  여기서 한 가지만 더 짚고 넘어갑시다. 즉 위에서 말하는 황제(黃帝)는 한족(漢族)의 조상으로 보고 있어서 상당한 문제가 발생하기도 합니다. 황제는 농경민인 한족의 신인데 소호씨는 이미 보셨다시피 東夷의 신입니다. 그래서 상당한 왜곡이나 해석상의 오류가 나타난 것으로 보입니다. 마치 황제가 동방의 신들을 낳은 것처럼 묘사한다는 말이죠. 즉 황제 이후에 夷족이 있는 듯이 묘사한단 말입니다. 이런 식의 신화 조작은 중화사상이 구체화되는 한(漢)나라 이후의 일로 생각됩니다. 사마천의 『사기(史記)』에서도 소호씨가 황제의 아들이라는 말은 없지요(『史記』第一 五帝本紀).
 
  일단 일제 이전은 고증 및 연구가 어렵기 때문에 김일제 이후를 살펴보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러나 저러나 우리가 지금까지 분석을 토대로 나타난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신라가 알타이 지역의 흉노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사실이겠죠.
 
  그래서 일단 신라는 고조선계와 흉노계의 연합세력으로 봐야겠습니다. 앞으로 더 깊이 있는 다른 연구결과가 나오게 되면 다소 수정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이제 신라와 흉노의 관계를 문화적인 측면에서 살펴봅시다. 대표적인 예로 제철기법과 편두로 나눠 살펴봅시다.
 
  먼저, 2000년 「황남대총 발굴 기념 학술대회」에서 박장식ㆍ정광용 두 교수는 황남대총 남분에서 출토된 철기유물을 분석한 결과 당시 경주지역에 유행한 대표적인 기술체계는 저온환원법에 의한 제강법이었으며 이는 비슷한 시기 백제지역에서 유행하던 방법과는 근본적으로 판이하다고 합니다.
 
  박장식 교수(홍익대)는 B. C. 1500년부터 사용된 철의 제강법은 크게 두 가지, 중국식과 유럽식으로 나뉘는데 유럽식은 액체상태의 주철(탄소함량이 많아 단단하나 쉽게 부서지고 낮은 온도에서 녹는다)로 도구를 제작한데 반해 중국식은 탄소를 거의 함유하지 않은 순철을 두드려 모양을 만드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삼국시대에는 백제와 신라에서 이 두 가지 철강법이 동시에 발견된다고 합니다. 이런 경우는 전 세계 어디에도 없다는 것입니다. 즉 신라에서는 유럽식 기술이 쓰인 반면 백제는 전통 중국식으로 철을 다뤘다 합니다.
 
  보존과학자인 정동영 박사 또한 황남대총 출토 금동제품의 분석을 통해 신라의 금동제품이 금순도 98% 이상의 아말감도금의 방법을 이용했음을 확신할 수 있다고 말하여 당시 신라의 금속공예 기술이 매우 뛰어났음을 강조합니다.
 
  다음으로, 신라와 흉노의 관련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 가운데 하나로 편두(扁頭, cranial deformation)를 봅시다.
 
  편두(扁頭)란 이마가 특이하게 눌려있고 고랑 같은 주름이 머리에 죽 둘러 있었고 머리통이 길게 늘어나 있는 것인데 이것은 두개골이 인위적으로 변형된 상태를 말하지요. 그런데 이렇게 편두를 하면 말 타고 투구를 쓰고 전투하기가 쉬워 생존 가능성이 크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편두와 같은 습속은 유목민들의 일반적인 습속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 편두라는 것이 마치 흉노족의 자취처럼 나타나고 있다는 말입니다. 흉노의 이동경로로 추정되는 몽고에서부터 프랑스까지 유적을 발굴해보면, 그 유적의 주인공들이 편두라는 것이지요. 예를 들면 게르만 지역의 튀링겐과 오덴발트에서도 훈족의 편두가 발견되는 것으로 추정해보면 훈족의 영웅 아틸라의 제국에서 편두는 보편적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에서도 "만주지방에서는 고래로 편두하는 관습이 있다.(제2권)"고 적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들도 흉노의 일반적인 습속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삼국지에서도 "진한(辰韓) 사람들은 편두(三國志 魏書 東夷傳)"라고 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신라의 금령총에서 발견된 기마인물형 토기의 주인공도 편두인데다 김해 예안리 고분군에서 발견된 4세기대의 목곽묘에서 모두 10여 개의 변형두개골 즉 편두가 보고 되었습니다. 아니, 금령총은 그렇다 쳐도 김해라면 한반도의 남단인데 그 곳까지 이 습속이 나타나고 있다니오?
 
  놀라운 일이지만 좀 깊이 생각해보면, 이 사실은 신라인들이 흉노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신라의 금관이 왜 유달리 작은지를 알 수 있게도 하는 것이지요. 편두가 아니면 이 왕관을 쓰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편두가 사람의 신분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합니다. 즉 귀족이나 왕족들은 편두라는 얘기지요. 최치원도 봉암사 지증대사비문(智證大師碑文)에서 "편두(扁豆)는 지존(至尊)의 상징"이라는 말을 남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편두는 북방계의 남하를 보여주는 예가 되는데, 이에 대해서 『후한서(後漢書)』는 "진한 사람들이 갓난아기의 두개골을 판판하게 만들려고 유아의 머리를 돌로 눌러놓는 특이한 관습이 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 기록은 『삼국지(三國志)』의 내용("아이를 낳으면 이내 돌로 머리를 누르는데 이것은 머리를 작게 만들려는 것이다" : 『三國志』魏書 東夷傳 弁辰)을 그대로 기록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편두를 마치 '몬도가네'식(엽기적)으로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청나라의 명군(明君) 건륭제(乾隆帝)는 분통을 터뜨리며 한족(漢族)의 역사가(歷史家)들이 몰상식하다고 말합니다.
 
  건륭제는 기본적으로 만주 東夷들이 자신의 습속에 대해 기록을 제대로 남기지 않아서 생긴 문제로 개탄하면서 "만주 땅에는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아기를 나무로 만든 요람에 넣어두는 오랜 관습이 있는데, 그러면 시간이 지나면서 요람 속 유아의 머리 뒷부분이 편편하게 되는 것이고 진한 사람들도 분명히 똑같은 관습을 가졌을 것(『欽定 滿洲源流考』卷首 諭旨)"이라고 합니다. 이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면서 한족들은 이민족들을 엽기적으로 몰아가서 야만인으로 몰아 부친다는 것이지요. 사실 이런 류의 일은 명나라가 가장 심했습니다.
 
  어쨌거나 이 장에서는 편두라는 만주의 풍속이 한반도 남부 지역까지 멀리 전하여졌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요. 그래서 신라와 북방의 연계성을 더욱 쉽게 분석할 수 있지요.
 
  신라가 단순히 고구려의 영향만 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은 최근의 고분 발굴에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지난 1998년과 2003년 각각 발굴된 삼연(三燕) 시기 선비족의 무덤인 랴오닝(遼寧)성 베이퍄오(北票)시 라마(喇口麻)동 묘지와 지린(吉林)성 지안(集安)시 고구려 태왕릉이 바로 그 대표적인 유적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삼연(三燕) 시기란 4세기 초 사마염이 세운 서진(西晉)이 붕괴하고 쥬신이 남하하여 세운 전연(前燕 : 337~370)·후연(後燕 : 384~409)·북연(北燕 : 409~438)의 시기를 말합니다. 전연과 후연은 모용(慕容)씨의 나라입니다.
 
  전문가들은 2004년 4월 출판된 중국사회과학원 고고연구소의 『고고학보(2004년 제2기)』에 나타난 라마동 묘지 출토 각종 마구(馬具)들은 신라고분의 출토품뿐만 아니라 가야와 백제, 왜의 마구의 연원까지 추적하는데 도움이 되는 자료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300여기에 달하는 라마동 묘지에서 나온 부장유물은 3670여 점에 달하는데 여기에는 생활용품·무기류·마구 등 매우 다양한 유물들이 있었습니다. 여기에 나타난 토기는 고구려와 유사하고 각종 마구들은 신라초기 고분 출토품과 비슷하며 금동제 말안장 가리개는 전체 형태가 왜의 5세기경의 대표적인 금제품인 오사카(大板)부 하비키노(羽曳野)시 곤다마루야마(譽田丸山) 고분의 출토품과도 흡사하다고 합니다.
 
  미술사가인 권영필 교수(한국예술종합학교)는 당시 고신라가 북방 유목민족 세력권에 있었으며 황남대총 유물은 그 문화 산물이라고 주장합니다. 즉 신라는 고대 동-서 교역로였던 비단길과 동해안 통로를 통해 4~5세기 국제문화를 적극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통일 이전의 신라는 황남대총 축조시기를 기점으로 이전의 전기 초원문화와 이후의 후기 초원문화로 나누고 중앙아시아 흉노족이 한나라 멸망직후의 국제정세 혼란을 틈타 신라에 영향력을 미쳤다고 풀이합니다. 금관에 나타나는 나무 가지형의 모양새는 알타이 주변과 중앙아시아 수렵민족의 신앙적 상징과 거의 같고 금장식편(영락)이 달린 형식은 중국에 없고 러시아 돈강 유역이나 아프가니스탄 일대에서 출토된 기원 전후의 유물과 비슷한데다 얇은 금판을 새 날개 형태로 오리고 수많은 영락을 단 금관 장식이나 금제 귀고리, 허리띠 조형 등은 로마와 터키 일대에서 크게 유행했던 것이라고 합니다[권영필,「황남대총과 신라의 국제교류」『황남대총의 재조명 국제학술회의』자료집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 2000)].
 
 한편 조금 다르게 볼 수도 있습니다. 이전에 있어왔던 흉노 세력(김일제 후손의 김씨 세력)이 권력을 장악하면서 선택적으로 북위나 고구려를 통해서 중앙아시아나 유럽의 금 문화를 지속적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이지요.
 
  북으로 가는 신라, 남으로 가는 부여
 
  황남대총의 거대한 무덤 속에는 수많은 유물들이 있는데 그 속에는 뜻밖의 유물이 있었죠. 바로 투명한 색깔의 그릇 파편들, 바로 유리였습니다. 그런데 이 유리 목걸이에서 발견된 사람의 얼굴은 동양인이 아니라는 것이죠.
 
  이 분야의 전문가인 이인숙 박사는 유리 분석실험을 통해 황남대총의 유리는 중국계 유리가 아니라 멀리 떨어진 로마계 유리라는 사실을 과학적으로 입증하였습니다. 결국 로마의 유리가 신라까지 흘러 들어온 것이죠.
 
  전문가들에 따르면 이 로마의 유리는 중국이나 바다가 아니라 초원의 길을 통해서 왔다고 합니다. 그 근거로 드는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4~5 세기 신라 지배자급 무덤에서만 나타나는 특이한 묘제, 적석목곽분이라고 합니다. 적석 목곽분은 남러시아의 시베리아 초원지대에서 활약한 스키타이 민족(기마민족)의 매장 풍습인데다 유물들도 기마민족들의 애호품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당시의 초원의 길에는 이들 스키타이인들과 또 다른 주인공, 흉노(몽골의 선민족)가 있었던 것이지요. 대체로 초원길 서부지역은 스키타이, 동부 지역(알타이)은 흉노라고 보시면 됩니다. B. C. 2세기경 스키타이는 역사에서 사라지지만 초원지대를 장악한 새로운 유목세력에 의해 동과 서로 교역은 계속 유지됩니다.
 
  정수일 교수에 따르면, 신라는 로마문화를 수용하여 자기의 환경에 걸맞게 변형·발전시킴으로써 각종 장신구와 금은제품을 로마와 공유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동아시아 문명권에서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정수일 교수는 로마의 누금감옥 기법으로 만들어진 이러한 세공 장식품들이 신라에는 흔하게 나오지만 당시 중국이나 일본 유물에서는 발견되지 않고 고구려에도 별반 없으며, 백제는 신라와 관계가 좋을 때의 유물에서만 약간 나온다고 합니다.
 
  이상의 논의를 보면 신라의 계통과 부여-고구려-백제가 다소 차이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즉 신라 쪽이 보다 고조선계와 흉노 쪽에 더 가까운 종족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동일한 東夷라도 한족(漢族)과의 교류와 그 영향력의 강약에 따른 차이가 있을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신라가 중국의 영향을 덜 받았기 때문에 좀 더 흉노적이라는 말이지 근본적으로 이들이 다르다는 말은 아니지요. 희한한 말이겠지만 한족(漢族)의 영향을 받은 부여계보다는 경제력·제도·문화의 면에서 세련되지는 못하면서도 금은 세공 기술이나 유물들은 훨씬 더 발달해 있는 나라가 신라라는 말이지요.
  
 기록이 부족하여 정확히 알아내기는 어려웠지만 여명기의 신라에 대하여 개략적인 그림을 그릴 수는 있을 것입니다. 특이한 점은 기록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매우 많은 연구들이 있었고 분석 범위도 광범위하여 매우 복잡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일반인들이 알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신라의 금(金)에 대한 과도한 집착은 신라의 후예(後裔)들에 의해 후일 나라 이름이 금(金)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고구려와 신라의 후예이기도 한 만주족은 금(金)이라는 같은 이름의 나라를 만들어 두 차례나 중국을 경영하기도 합니다.
 

 

  금(금·후금)나라를 건설한 만주족은 황족의 성은 경주 김씨로 조선반도와는 항상 친밀감을 보이고 있습니다. 참고로 17세기의 자료이긴 하지만 몽골 칸국의 황실인 보르지긴 씨족도 알탄오락(黃金氏族), 즉 김씨(金氏)로 되어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신라는 부여·고구려·백제 등과 마찬가지로 한겨레의 공통된 특징을 강하게 가지고 있고 그 성격이 일부 알타이 서부 지역과 유사한 형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라는 고조선계와 흉노계의 연합세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신라의 문화는 토착 문화를 바탕으로 하여 한겨레의 대륙문화에 중앙아시아·로마 문화까지 수용하여 융합시킨 하나의 복합적 문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철기문화 새 유입통로 발견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81&aid=0001946046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01&aid=0000152227

source : http://k.daum.net/qna/view.html?qid=4E2Lh

Posted by 3LegsCrow::하늘날다 두루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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